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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시대 고행길 마다않고 민주화 노둣돌 놓다…조선대, 문병란 시인과 이철규 열사
[임의진 시인의 광주 속살 순례기] ‘언저리와 변두리’ 시즌 2 <3>
시민 7만명 기부로 세운 민립대학
문병란 시인 교수 재직하며 시 발표
민주화운동 불씨 지핀 이철규 열사
그 신념과 영혼, 장미향에 위로 받고
‘직녀에게’ 시비 두고두고 읽혀지길
2023년 06월 28일(수) 19:25
조선대학교는 1946년 광주시민 7만2000여명의 기부를 바탕으로 설립된 민립대학이다. 이철규 열사의 신념과 영혼, 문병란의 시가 어린 곳으로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근대교육 시스템, ‘초중고대’라는 학제가 펼쳐진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그리고 그 교육기관엔 어김없이 우리말 금지와 식민사관의 주입이 뒤따랐다. 수탈과 식민지배 안에서 재한 일본인들이 ‘광주 번영회’를 창립하여 우리 지역의 도시 개발 사업을 독점했다. 관민 합작 시대의 도래였는데, 번영회 멤버들은 정계에 진출하고 온갖 이권 사업에 개입했다. 이를 누군 ‘풀뿌리 침략’이라고 했다.

사학자 지수걸은 ‘일제하의 지방 유지에 대해 일제가 강제와 동의에 기초한 국가 헤게모니를 지방사회 내부에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성한 총독 정치의 매개집단, 재산력과 사회활동 능력인 학력, 당국의 신용과 인맥을 고루 갖춘 지방 유력자 집단’의 전횡을 꼬집었다. 이들 가운데 일본인들이 직접 면장 역임, 양조장 사업, 광산 사업, 영농사업, 대부업, 잡화상에 이어 광주학교 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근대식 학교는 그렇게들 우리 지역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렸다.

‘시인 문병란의 집’
그런데 조선대학교는 출발이 좀 남다르다. 일제가 무너지고 조국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 이른바 백성 ‘민’의 세상, 그런 민중의 열망이 ‘민립 학교’라는 전무후무한 전개로 구체화된다. 조선대학교는 1946년 쌀 한 말, 묵직한 한 석, 더러는 철근과 벽돌을 기부한 7만 2천명 광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현실화 된 ‘호남민중교육의 교두보’였다.

다가오는 2026년이면 80주년을 맞게 되는 우리 호남 최고의 명문인 조선대학교. 그러나 그 중간기는 암흑기라 할 만큼 어둡고 참람하고 무력했다. 민립이 사립으로 둔갑하고, 황당하고 황망한 박모 이사장의 기행과 파탄, 고스란히 광주 시민들이 치러야 했던 아픔들. 외롭고 지쳤던 학원민주화 투쟁을 기억한다. 여기에 대응해가며 우리 호남의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는 1995년 강진에 있는 남녘교회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총회장의 교회에서 전도사 겸 비서로 일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떠나 기독교대한복음교회라는 민족 자주/토착 교단으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무교회주의에서 출발한 이 교단은 교회협(NCCK)을 통해 작고 야무진 목소리를 내고 있던 중이었는데, 총회장 오충일 목사는 낚시를 하다 말고 나에게 그랬다. “민주나 통일은 한국에서 예수의 복음이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정치군인이나 부자들은 싫어하는 말이거든.”

임의진 작 ‘조선대와 체 게베라’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나오자 장쾌한 쇠귀체로 교회 현판 글씨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입당송으로 ‘직녀에게’를 부르자 권했는데, 노인 30명의 시골교회에서 매주 쩌렁쩌렁한 뽕짝 ‘쪼’로 “이벼리 너무우 기일다. 슬프미 너무우 기일다. 선치로 기둘리기이엔 세워리 너무우 기일다. 말라부우튼 은하아수 누운무울로 노기고 가슴과아 가스음에 노오두웃돌을 노오아...” 울면서 우울면서 이 노래를 같이 복창했다. 내가 딱 10년 이 교회에서 목회하며 매주 불렀던 통일 노래는, 내가 떠나자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여전히 그대로 있고, 주구장창 노래를 불렀던 얘기가 전해지는 정도의 우의만 가까스로 남았(기를 바란)다.

‘직녀에게’를 찾아 문병란 시인을 뵙기도 했다. 직접 시낭송을 들어볼 기회도 있었다. 원래의 시는 살벌했는데, 심지어 분단의 원흉들에게 잃은‘ 처녀막’이 등장하고, 갈기갈기 몸을 잃은 한 여인 직녀의 슬픔이 가득 번지는 시였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윤상원을 기리는 모임이었다. 반대로 내가 노래하고, 시인은 통일의 시를 한 수 들려주었다. 우리는 뜨거운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고, 시인은 고인이 되어 천상의 오작교를 건너 떠났다.

최근 들른 지산동의 ‘시인 문병란의 집’은 살아생전 시인이 기거했던 자택을 동구청이 매입해 2021년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시인의 생가는 화순 도곡에 있고, 지산동의 기념관은 시인이 평생 머문 자택이다. 시인은 조선대 문리대 문학과에 입학하고, 스승이었던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된다. 대학을 마친 뒤 순천고, 광주제일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던데 1969년 조선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1976년 그의 대표시 ‘직녀에게’를 심상지에 발표했는데, 당국에 의해 이적성 혐의로 판매금지를 당했다.

80년 오월엔 내란 선동 죄목으로 구속되고 강단에서 쫓겨났다.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학교로 되돌아와 퇴임하고 별세하기까지, 조대 언저리 지산동을 떠나지 않았다. 시인 문병란의 집엔 나무판에 적힌 싯구가 캄캄하던 우리 눈을 명징하고 또렷하게 뜨도록 만든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마라” 이 집에선 고행길을 함께 했던 시인들이 막걸리를 나누기도 했던 곳. 황석영과 김남주, 김준태 시인 등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2층에는 기타와 오디오가 있는데, 노래가 된 시들과 즐겨듣던 차이코프스키 음반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이 좁은 골목 끝집에서 어두운 시대의 우울한 겨울을 나기도 했었다.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가. 세상은 얼마나 무섭고 고독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도 없이 눈 내리는 이 새벽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 산다는 것은 음악보다 얼마나 아프고 쓰린 울음인가. 어디선가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누워간다. 오 기침 소리 기침 소리여.”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문병란의 시에는 솔직담백한 ‘게미’가 있다. 숨길 수 없이 깊은 맛을 이곳에선 게미라고 하는데, 보통 우울하고 슬픈 마음을 게미에 담아 저항과 분출로 연결 짓는 방식의 시는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가는 차량의 불빛을 연상하게 만든다. 조선대 교수진에는 그의 의기와 기품을 함께한 동료 작가 김준태 시인, 나희덕 시인, 신형철 평론가 등 그야말로 문필들이 게미를 이어 나갔다.

내가 또 기억하는 조선대의 인물은 이철규 열사다. 부검이 열린 전남대병원 앞길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과 수원지에서 떠오른 열사의 마지막 얼굴은 한 시대의 선명한 기억이다.

1964년 장성 삼서면 대도리 출생인 이철규 열사는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뒤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을 맡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던 중 제4수원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주검은 고문사, 시신유기라는 의문을 달고 오래도록 우리 기억 속을 맴돌고 있다.

소설가 김선정은 이 시대의 풍경을 다음처럼 간략하게 적고 있다. “어린 내 눈에도 조선대학교는 이상한 곳이었다. 총장이 교수를 폭행하고 아침 구보를 시킨다는 학교, 그 재단 산하의 여자중학교인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교장실에 들어가면 교장 사진 위에 재단 총장의 사진과 당시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조회 시간에는 교장에게 거수 경례로 인사를 한다. 월요일마다 주초 고사라는 시험을 봤고 매달 본 시험 성적에 따라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 색깔이 다른 배지를 달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따귀를 맞고 발길에 차이고 정학 퇴학을 당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학교 밖에선 날마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과 학생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조선대학교 건물에는 한쪽 눈이 튀어나온 이철규 열사의 시신을 그린 거대한 걸개그림이 오랫동안 걸려있었다. 나는 이철규 열사 추모를 기치로 걸고 전교조가 주최한 참교육 글쓰기 한마당에 나가 대상을 탔다. 그 불온한 상장 문구를 전교생 앞에서 교장이 읽어주며 표창을 받는 기분은 어쩐지 통쾌했다.” 그녀의 수상식에서 박수를 함께 쳐주고 싶은, 나도 1인이다.

학내 민주화 투쟁 이후 조선대는 다시 시민들의 곁으로 돌아왔고, 죽은 이철규 열사가 살아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학교의 교정에는 가끔 노래패 ‘함성’이 그날의 분노와 결기를 세우는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얼마 전 나는 범능 스님 정세현 형의 10주기 기념공연에 갔었는데, 오랜만에 조선대 노래패 ‘함성’의 노랠 들을 수 있었다. 알고 지내는 건반 연주자 몽심씨와 옹달샘 서일권 선생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민주와 통일을 노래했다. 조선대는 이제 민주화의 새벽길, 조국 통일의 선봉이니 하는 그런 형형한 별빛의 말보다는 취업과 학생유치 생존이 더 시급한 목소리가 되었다.

조선대하면 의형제인 한희원 화백의 모교로도 항상 얘기를 듣곤 한다. 장형(큰형)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대부분 화가들이 조선대 미대를 나왔다. 내 손위 누이도 같은 미대를 나왔는데, 학교 댕기면서 계단 오르느라 예쁜 다리가 알통이 굵어졌다. 작품활동을 하진 않지만 붓을 꺾지는 않았더라. 한화백은 가끔 웅장한 크기의 무등산도 그리는데, 체 게바라처럼 머리를 산발한 채로 거친 그림을 그리시는걸 보곤 했다. 총 대신 붓을 들고 시작한 민중미술 그림은 자유롭고 부드러운 컬러를 지니면서 근사하게 발전해왔다. 장형을 보고 있노라면 무등산을 배경으로 삼은 조선대 학풍을 짐작하게 된다. 가끔 홍성담 화백도 뵙곤 하는데, 나는 홍성담 화백이 조선대 재학시절 사용하던 아틀리에 공간에다 벗들과 ‘메이홀’을 차리고, 남녘교회 이후의 사회활동을 그곳에서 해왔다. 조선대 출신의 인연들이 겹겹이 나를 ‘무등산 배경’처럼 에워싸고 있다.

언젠가 조선대 교정에 장미축제를 연 날 애인이랑 같이 그 장미향을 맡으러 갔는데, 마침 이런 노래가 내 입에서 시계 태엽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더라.

“외로운 밤엔 나 홀로 걸었네. 가슴속에 피는 한 잎 떨어진, 상처만이 남아 있는 한 떨기 장미처럼 슬픈 내 영혼... 뜨거운 마음도 나의 슬픈 그 장미. 돌아오지 못할 시절~ 한 떨기 사랑 장미같은 사랑~” 조선대에 다시 장미축제가 열리면 좋겠다. 이철규 열사의 신념과 영혼이 장미향에 위로 받으시고, 학내 공원에는 오작교를 하나 두어 그 앞 ‘직녀에게’ 시비가 조국 통일의 그 날까지 두고두고 읽혀지길.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 심야버스 등의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