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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동, 버스터미널과 대인시장…전라도땅 곳곳으로 흘러들던 내 기억 속 광주 시작점
임의진 시인의 광주 속살 순례기 ‘언저리와 변두리’ 시즌 2 <6>
버스안내양 했던 소설가 공선옥
망월동 묘지 찾았던 시인 기형도
초라한 대인동 터미널에 대한 회상
백화점 들어서 기백만원짜리 옷 팔고
길 건너 대인시장 만원짜리 ‘몸뻬’ 팔아
2023년 08월 30일(수) 19:35
전라도땅 곳곳으로 향하던 시외버스의 출발점, 광주 대인동 공용터미널은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장소다. 1992년 공용터미널 모습. <광주일보 자료사진>
영화 ‘패터슨’을 빨개진 눈으로 보았다. 원작이랄 수 있는 의사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도 꼼꼼히 읽었지. 시집 표4에 달린 “윌리엄스의 시에 이끌려 패터슨 시티를 여행하다가 영화 패터슨을 구상하게 되었다” 영화감독 짐 자무쉬의 한마디. 또 “시인이 되는 첫째 조건은 외로움을 아는 것이다” 시인 윌리엄스의 ‘토씨’가 영화의 후렴처럼 가슴에 울려 퍼졌어. 영화는 한 버스 운전기사가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름도 운전기사인 배우 아담 드라이버가 출연하는 영화.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소도시 ‘패터슨’에 버스 운전사 이름도 ‘패터슨’.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펼쳐지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23번 버스를 운전한다. 운전 중 시상이 떠오르면 정차하면서 메모장에 기록하기도 해.

일과를 마치면 아내와 소박한 만찬. 레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맥주가 있는 선술집에 당도한다. 쉽게 볼이 빨개져 집에 돌아오면 이른 잠을 청하지. 패터슨은 아무도 모르게 시를 쓰는데, 그 시가 차곡차곡 화면에 쌓이면서 영화는 오만가지 자잘한 사건들과 버무려진다. 사자어금니처럼 아끼던 시 노트를 강아지가 우걱우걱 씹고 찢는 장면엔 아이쿠나 심장이 내려앉아. 시를 쓰고 버스를 모는 패터슨과 시를 쓰고 의사로 근무하는 시인 윌리엄스. 한 기자가 시인 윌리엄스에게 환자를 보면서 시를 쓰는 일의 고단함을 캐묻자 “어렵지 않아요. 둘은 다른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두 부분이죠. 둘은 서로를 보완해요. 한쪽이 나를 지치게 하면 다른 한쪽이 나를 쉬게 만들죠”라고 대답했다. 영화감독 짐 자무쉬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면서 잠시 놓고 쉬라, 뭐라도 읊조리고 글쩍거리라 권한다.

광주에 처음 생긴 버스터미널은 대인동에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자리에 터미널이 그대로 있는 것만 같아. 전라도땅 곳곳으로 흘러가던 시외버스. 타고 내리던 자리와 그 흩어진 골목들이 소금쟁이가 그어놓은 물길처럼 뚜렷해지는 기억이다.

소설가 공선옥 샘은 한때 광주에서 버스안내양, 버스차장을 했다. 시방은 담양 수북면 같은 동네에 살아서 종종 뵙기도 해. 나는 그녀를 누나라 부르는데, 내가 누나라 부르는 여인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부르는 게 편했고, 그이는 나를 ‘임목’이라고 부른다. 예전부터 목사를 부를 때 친구들은 사자를 빼고 불렀는데, 사는 잘못했다간 죽을 사자가 된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대인시장에서 예술야시장이 열리면서 조형물과 벽화도 많이 설치됐다. <임의진 제공>
“대인동, 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에 ‘공용 터미널’이라 불리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나는 1979년에 광주로 왔고, 지금은 금호고속으로 이름이 바뀐 광주고속의 안내양을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은 내 스무 살의 첫 사회생활 기억이 있는 곳이다... 중략... 깊은 골목 안에 있는 도시 빈민들의 하루살이 방, 혹은 달방이었는데 푸른 대문을 들어서면 미로 같은 구조 속에 부엌은 없고 긴 툇마루에 나무 문살로 된 방문이 수십 개가 늘어서 있었다. 주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날품팔이, 터미널이 가까워서 버스차장, 길거리 노점상, 황금동 술집 아가씨 등등이 깃들어 살던 집...” 공선옥의 ‘햇빛 쏟아지던 날들의 무등산’이란 산문엔 소설가의 지난날이 영화 패터슨의 장면과도 오묘하게 겹친다.

또 시인 기형도가 광주에 내려 어슬렁거린 곳도 대인동의 버스터미널이었다. “무등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른 숲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 내렸다.... 중략... 망월동 공원 묘지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에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물어 25번 버스가 간다고 알 수 있었고,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현대예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 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희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형도 시인의 광주 체류는 고작 하루였지만, 회사마다 작게 흩어져 있던 당시의 고속터미널과 시골로 오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대인동의 풍경, 25번 버스에 올라타 망월동 방문, 또 이한열의 어머니를 마을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는 기이한 장면도 펼쳐진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이 어머니예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시인의 여행일기는 터미널에서 순천 가는 버스표를 끊으며 구비구비 뻘밭 길로 이어진다.

대인동에서 떠난 광주공용버스터미널은 광천동으로 모아지고 옮겨진다. 회사마다 고속버스를 운영하며 고속버스 터미널이 흩어져 있었다. 1992년 광천동 시대가 열리고, 기형도가 본 그 비좁고 낡은 터미널(들)은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터미널로 일순 바뀌었다. 지금도 국내에선 가장 큰 규모를 가졌다고 해. 이후 유스퀘어(U. Square)라는 아리송한 이름으로 작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땐 ‘차부’라고 부르던 게 터미널로 혀를 꼬부라지게 하더니 급기야는 ‘새꺄~ 같은 스케아~’가 ‘되어부렀다’. 시민들의 땅에다 신세계 백화점이 도도한 규모로 자리하고, 나름 복합문화공간은 광주시민들뿐만 아니라 전남도민, 또 이 지역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징검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복합 쇼핑몰 논란 속에서 이 거대한 건물조차 방어를 제대로 못 해주고, 지역민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염치나 눈치가 없는 거 같다.

광주대인시장에 가면 온갖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임의진 제공>
버스터미널이 떠난 자리를 다시 가보자. 대인동엔 롯데백화점이 들어와 기백만원짜리 옷을 팔고, 길 건너엔 대인시장이 만원짜리 ‘몸뻬’를 판다. 대인시장의 컴컴한 미로 속을 뚫고 걷다보면 복판에 생뚱맞은 고래 한마리가 둥둥 천정에 떠 있다. 쳐다보는 이 하나 없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외롭고 고단한 표정으로 말이다. 가끔 국밥을 먹으려고 벗들과 대인시장에 간다. 국밥집마다 돼지 내장이 푹 고아져 좌선중이고, 귀를 쫑긋 모은 채 삶아진 돼지머리는 아무개 굿당이나 잔칫상에 올라가길 기다리며 웃고 있다. 천정의 고래와 대조되는 표정이다. 돼지머리는 달마 대사의 면상처럼 죽음마저 관조한, 깨달음을 다 얻은 득도의 관상. 생과 사란 무엇인가. 잘 살지는 못해도 잘 죽기라도 하면 다행이겠다는, 오로지 한 염원뿐이다.

황금동이나 어디 빨간 술집들보다 더 노골적인 ‘아가씨집’이 대인동 골목에도 여럿이었다. 몸을 파는 여인들이 이 골목에 살았는데, 길에서 젊은이나 노인이나 가리지 않고 말을 붙이거나 어깨를 끌었다.“쉬었다 가랑께요”, “아따 교회 댕긴단 말이요” 하면 “교회 댕기는 아가씨도 있는디...” 하면서 붙잡는 골목이었다. 외롭고 서럽고, 인생의 바닥을 친 애처로운 삶들이 켜켜이 모여 살던 골목집들은 헐리고 부서지는 중이다. 탁족을 하던 냇가도 시멘트로 덮여 암암한 굴속이 되었고, 어르신들의 놀이터 콜라텍엔 한 때 주름잡던 제비족 삼촌들이 은퇴하여 요양병원에들 계신다.

둘러앉아 꼬막을 까먹으면서 탁주를 걸칠 수 있었던 집도 주인이 병들면 문을 닫았다. “아무나 데친다고 그 맛이 나꺼시오? 잡사 보시믄 알 거시오.” 그야말로 ‘잡사 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던 그 집, 그 아지매들. 버스에서 뛰어내리면 허기를 달래주던 밥집들이 영영 사라져버렸다. 거북이표 광주고속 기사가 빳빳한 제복 차림으로다가 들어와 이빨을 쑤시며 나가던 식당들. 어린 버스안내양들이 모여 깔까르르 웃던 소리들도 저 차창 밖으로 훠훠 날아갔는가. 새는 답을 알고 있을까. 저 나무는 알고 있을까. 소방서의 빨간 불차인지 물차인지가 출동하며 남기는 사이렌 소리가 그 웃음소리의 구슬픈 대답일까.

나는 한때 그 골목 어디, 반도상가 맞은 편 ‘286 컴퓨터 조상님’을 파는 상가에 요샛말로 알바생으로 댕겼다. 서울로 상경 전에 보낸 기간은 대인동과 얽혀있다. 4학년 졸업반에 비밀 독서클럽이 들통나 학교에서 제적되어 잘리고, 누군가 신발을 신은 채로 자취방을 덮쳐 도망을 치는 중이었다. 노동자신문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글을 짓고, 심지어 국제노동자 어쩌고 하는 거창한 누구를 만나 엮이기도 했다. 형사에게 붙잡힌 며칠간 고막이 찢어지도록 뺨을 얻어맞았다. 또 취조한 경찰이 정성스럽게 무릎도 밟아주어 지금도 겨울엔 절뚝거린다. 말없이 우시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그만 머뭇대곤 그랬다.

‘어짜쓰끄나’ 한숨을 몰아쉬던 시절은, 그러나 지나갔고, 이 또한 지나가리란 말은 틀림없었다. 버스와 여자는 지나가면 또 온다고 했건만 그러지도 않았다. “암시랑토 안해야” 누굴 만나나 내게 할당된 단어는 정해졌고, 그렇게 해야 모두가 두루 편했다. 나뿐만 아니라 사실 그 시대의 우리 모두가 “암시랑토 안해야”하면서 견뎌낸 세월이었다. 대인동에 가면 지금도 누군가 살며시 귓속말로, 걱정 붙들어 매라고, 괜찮다고, “암시랑토 안해야. 니나 쪼께 신경쓰고 살어야~”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