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 ‘징비의 정신’ 살아 숨쉬는 휴식과 강학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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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병산서원] ‘징비의 정신’ 살아 숨쉬는 휴식과 강학의 공간
임란 극복한 명재상 류성룡과
제자이자 셋째아들 류진 배향
병풍같은 병산과 낙동강 ‘아늑’
학문도량 넘어 인과 예 가르침
‘서애집’·‘징비록’ 등 저서도
2022년 10월 16일(일) 23:00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국난 극복의 정신이 깃든 서원이다. 사진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누각 만대루.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내부 모습.






유생들의 강학활동이 이루어졌던 입교당.






병산서원 앞에 병풍처럼 서 있는 병산.








늦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든 지가 한참이 지났다. 이제 달력은 두 장밖에 남지 않고 어느새 사르르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봄꽃이 만발하던 때 길을 재촉했는데 이제는 한낮의 햇귀가 떨어져버리는 가을 한복판에 접어들고 말았다. 화르르 타오르던 여름의 열기가 차라리 그리운 것은 비누 녹듯 사라져버리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시리즈의 마지막 여정에 당도했다. 오늘 행선지는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안동하면 하회마을, 도산서원이 우선 떠오른다. 가장 안동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에 비해 병산서원은 일반인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고전이나 고문, 한국학 등 옛것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이들이나 우리 것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문화의 보고일 것이다.

대체로 서원하면 여전히 옛날 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사실 학창시절에는 학교와 연관되거나 환기되는 것들에 대해 품을 열어 수용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나친 입시와 시험, 서열 위주의 결과에만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 풍토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관점으로 옛날 학교를, 다시 말해 문화적 관점으로 서원을 보면서, 우리의 중요한 문화라는 사실과 만날 수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사방이 안온한 풍광에 둘러싸인 그러면서 묵향이 배어나오는 웅숭깊은 문화적 결집체로서의 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었다.

안동의 병산서원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하다. 담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오밀조밀하면서도 큼직큼직하다. 그리고 만대루에 올라 저편 병풍처럼 둘러싸인 병산을 바라보라. 푸른 낙동강과 아늑한 병산이 오랜 벗처럼 다정하게 서로를 그러안은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된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며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옛 사람들의 학문이 입신과 출사를 넘어 인(仁)과 의(義)의 장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흔연스레 흘러든다.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내부 모습.
이곳에 서원을 지은 이의 마음이 읽힌다. 산자수명(山紫水明)이 따로 없다. 삿된 마음이나 물욕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저 청허한 산과 넉넉한 자연에 이편이 안기는 기분이다. 푸르고 맑은 물이 병산을 에둘러 돌아가는 풍경은 마치 진경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하다. 수묵화보다 아름다운 실재라 해도 될 것 같다. 가슴에서 발원한 시 한 소절이 막힘없이 흘러나오려 한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였다.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도승지, 우의정 등을 거쳤다. 무엇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만큼 그의 학문의 뿌리가 탄탄했음을 보여준다. 서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군무를 총괄하고 군비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임란을 극복한 재상의 심중에는 늘 징비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해서 다시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이 바로 ‘징비’다. 원래 중국 고전인 서경에 나온다고 하는데, 만반의 대비를 언급할 때 곧잘 인용되는 어휘다.

그러나 서애는 선조 31년(1598)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든다. 전란을 겪으면서 국정의 난맥은 실타래처럼 꼬였을 것이다. 당파에 따라 역사적 사실과 관점에 따라 그리고 승자와 패자에 따라 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이하다. 서애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거론할 때 도학, 문장, 글씨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학문은 학문대로 문장은 문장대로 경세는 경세대로 병법은 병법대로 밝았다고 전해오는 걸 보면 그렇다. 또한 ‘서애집’을 비롯해 ‘징비록’, ‘난후잡록’, ‘상례고증’ 등 다양한 저서를 남긴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유생들의 강학활동이 이루어졌던 입교당.
당대와 오늘의 역사를 떠올리며 느릿느릿 병산서원을 둘러본다. 이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 류성룡과 그의 제자이자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1582~1635)이 배향돼 있다. 류성룡이 젊은 시절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1607년 선생이 타계하자 묘우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으로 사액 을 받았다.

서원의 관문 복례문(復禮門)을 통과하기 위해선 옷깃을 여며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예로 들어가는 것이 인(仁)이다”라는 말에서 ‘복례’는 연유한다. 학문의 첫걸음, 모든 공부의 시작을 이름하는 말이다. 복례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만대루가 나온다. 막힌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웅장함이 예사롭지 않다. 조화와 절제 그러면서 호연의 기상이 밴 누각은 한국인의 심상을 닮은 것도 같다. 만대루를 통과하면 유생들이 학문을 익혔던 강당인 입교당이 나온다.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품위와 지고함! ‘소학’ 입교 편에 나오는 ‘하늘이 준 본성에 따라 가르침을 바르게 세우는 전당’이라는 뜻을 벅벅이 되새기게 된다. 자연과 건축의 조화 그리고 인의 윤리가 충분히 세계문화유산에 값하고도 남는다.

병산서원 앞에 병풍처럼 서 있는 병산.
병산서원을 나와 하회마을로 향한다. 지난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은 한국적 문화가 숨 쉬는 지역이다. 또한 풍산류씨가 600여 년 대대로 혈연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기와집, 초가 등 등 전통 가옥이 남아 있어 마을이 하나의 거대한 문화재인 셈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거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의 제일은 하회’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하회마을에는 서애의 정신이 응결된 충효당이 있다.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 당호로 류성룡 사후에 선생의 학덕과 청렴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관직에서 파직을 당하고 낙향했을 때 당시의 집은 단촐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만큼 서애의 삶이 검박한 했던 탓에 선비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추렴을 했다는 말도 있다.

‘지난 일을 뉘우치고 앞으로의 교훈을 잊지 말자.’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해서 다시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은 가슴판에 새겨도 부족하지 않다. 서애의 징비 정신이 새삼 느껍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만큼 어지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일 터다. 나라와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당파와 정파 싸움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의 행태는 500년 전 국난의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출세와 명예가 나라의 존망과 안위보다 귀한 이들에게 과연 징비의 정신이 통용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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