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 서원…조선 성리학을 꽃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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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 서원…조선 성리학을 꽃피우다
주세봉의 백운동서원서 출발
명종때 현판·서적 등 하사 받아
최초 ‘사액 서원’으로 격상
4000여명 인재 배출 요람
서원 초입 수백그루 소나무
‘취한대’ ‘경렴정’ 정자 풍광 압권
2022년 06월 26일(일) 23:00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賜額) 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가치를 전수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2년(중종37)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를 건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토대가 됐다.

이후 1547년(명종2) 경상감사 안현이 서원관리침인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작성하고 관둔전 30결과 서적을 비치함으로써 서원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그러다 본격적인 발전의 토대를 닦은 것은 1549년(명종4)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다.

당시 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국가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책을 마련했다. 임금에게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한 것. 이듬해인 1550년 명종은 ‘소수서원’이라는 편액과 아울러 노비와 전답, 서적을 하사한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 나아가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출발하게 된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언제나 그 무게를 지니기 마련이다. 역사라는 내력 또한 오롯이 담고 있는데 소수서원에 가 보면 군데군데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는 물론 경관, 건축, 사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초 서원에 값하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입원록(入院錄)만 봐도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가 무려 4000명에 이를 정도니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의 인재 배출 요람으로 손색이 없다.

영주는 경상북도 북쪽에 자리한 도시다. 소백산 고원부지에 형성된 고장으로 동에는 봉화군, 서에 충북 단양군, 남으로 안동시와 예천군, 북으로 강원도 영월군과 맞닿아 있다.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세계문화유산 부석사와 풍기 인삼, 풍기 인견은 영주의 대표 문화와 산물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선비 정신을 거양하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선비촌이 있다.

영주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이라 가는 길이 수월치가 않다. 초여름이지만 올해는 무더위가 20여 일 빨리 당도한 터라 차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따갑기 그지없다. 휴게소를 거치고 조금 바람을 쐬다 보면 넉넉잡고 5시간 넘게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더욱이 광주에서 대구까지 88고속도로를 달려 대구에서 다시 경북 내륙, 강원도로 뻗은 중앙 고속도로를 한참이나 달려야 한다. 경북 내륙의 끝이자 강원도 초입과 맞물린 지역이 영주다. 취재가 아니라면 굳이 다른 일로 찾을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직접 차를 몰고 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초 사립대학, 최초 서원을 알현한다는 기대감이 여타의 조건을 앞지른다.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은 힘이 있기 마련이다. 자료로 접하는 것이 아닌 현장의 생생한 모습과 정보를 직접 보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교육과 가치가 실답게 구현됐던 현장이라 오늘날의 교육의 관점에서 새로운 면모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문화유산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천천히 둘러보는 데 묘미가 있다.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정신을 이편에서 공감할 때 비로소 문화유산과의 대화는 실현된다. 현대와 과거라는 장벽 또한 시나브로 무너지게 된다.

소수서원은 초입부터 다르다. 서원 경내에 소나무 수백 그루가 주변을 덮고 있다. 얼추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에 이를 것 같다. 그 자태 또한 근엄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그저 그런 소나무 숲이 아니다. 바람과 풍상에 적응을 한 소나무들은 현자의 위엄이 배어나온다. 흔히 소나무를 학자수라 일컫는데 ‘소나무처럼 삶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 올곧은 선비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다.

소수서원 잡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온다.

“1654년 정월 25일 묘우 남쪽 담장 서쪽 편으로 영귀봉 아래에서 석주(石柱) 남쪽 냇가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00 그루였다. 잘 길러 밭을 갈거나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는 일을 금할 것. 새로 낸 길과 오솔길을 가다듬어 소나무를 심을 것, 앞으로 사이사이 더 심어 무성하게 할 것”이라 기록돼 있다. (소수서원관리사무소, ‘소수서원’)

소나무 숲 안에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있다.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고 절 행사가 있을 때 입구에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것을 지탱하는 기둥을 지주라한다.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3년(1457) ‘단종복위운동’ 이 좌절되고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됐는데 이 당간지주만 남았다 한다. 회헌 안향선생이 유년에 이 절에서 공부했으며 후일 주세붕 군수는 서원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해온다.

서원 앞으로 죽계라는 시내가 흐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하여 취한대(翠寒臺). 퇴계 선생이 대(臺)를 세웠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 허물어져 그 자리에 터를 닦아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그 뜻이 심상치 않다.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옛시 ‘송취한계’(송취한계)에서 비취 ‘취’(翠) 자와 차가울 ‘한’(寒) 자를 따와 지었다고 전해온다.

서원 오른 편으로 경렴정이라는 정자도 수려하다. 1543년 주세붕이 건립했으며 우리나라 서원 정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다.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주돈이의 호인 ‘염계’의 첫글자 ‘렴’(濂) 자를 땄고 높인다는 의미에서 ‘경’(景) 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자 강학당이 훤히 내다보인다. 때마침 선비 수업이 한창이다. 소수서원 학맥을 계승하기 위한 일환으로 진행되는 과정인 것 같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이들은 조선시대 유생과 흡사하다.

소수서원 현판(경북 유형문화재 제330호)은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 재임 시 나라에 상소를 올려 명조 5년에 하사받았다. 사액소원의 효시답게 역사가 깊다.

서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늘날의 도서관인 장서각을 비롯해 독서와 공부하는 공간인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의 모습이 보인다. 곳곳에 우리나라 최초 서원이라는 유서 깊은 내력이 펼쳐져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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