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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12> 전주·군산 형무소 재소자 집단 사살 사건
군경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치유되지 못한 상흔
전쟁 발발 직후 전주형무소 재소자들 학살
70여명 신원 확인…전체 규모 추정 어려워
‘반동분자’ 규정 우익인사 천여명 희생되기도
2020년 전주시 유해발굴 시작…전시회 개최
군산, 좌익사범 기록없어 발굴시도조차 못해
2023년 06월 04일(일) 19:05
지난 2020년 민간인 유해발굴 현장. <전주시 제공>
“6.25때 내가 16~17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 교회(소리개재, 전주 동부지역)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죽인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 ...(이하 생략)(백모씨 88·전주시 덕진구 산정동)”.

박모씨(8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는 한국전쟁 당시 작은아버지가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었지만 전쟁 발발후 어딘가 끌려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누이가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오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루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이 유해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보고서 발췌(2021, 전주시, 전주대학교박물관)’



전쟁 발발 전후를 즈음해 한강이남 형무소들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받는 호남지역에서도 그 아픔은 존재했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했지만 상흔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전북지역에서는 당시 형무소에 수용중인 민간인들의 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경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희생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70여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당한 장소가 당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km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들이 많이 수감됐었다고 하는 것이 피해가족들의 증언이었다.

이념 차이로 우익인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앞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에서 “1950. 9. 26~9. 27 양일간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1000여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전주시 3차에 걸쳐 희생자 유해발굴, 44개체 확인 =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둔 2019년 전주시 주도로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전주시와 전주대학교의 유해발굴이 시작됐고, 희생자 44개체(치아기준)가 발굴돼, 안치됐다.

먼저 2019년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 및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 사전 조사가 진행됐다.

두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효자동 3가 산 195-1번지)에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확인돼, 발굴조사로 전환됐다.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서는 2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유해 매장 추정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황방산일대 위주로 3차 조사가 진행중이다.

황방산 발굴조사 결과 유해 매장지는 3열의 구덩이 형태로 확인됐다. 구덩이는 모두 남-북 방향을 하고 있으며, 등고선이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고 길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살 후 매장한 것으로 판단됐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조사단은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조사보고서(2021년)에서 “이러한 것은 전쟁 전후에 계획적으로 학살을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학살의 주체가 탄약류에 의해서 구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탄약류는 칼빈소총 탄피, M1총 탄피, 탄피, 탄두 및 철제편 등이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품은 그 당시 군인 혹은 경찰이 착용하는 무기체계와 일치하고 무기체계의 일치는 학살의 가해자가 그 당시 군인과 경찰 등 정부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었다. 치아를 분석한 결과 마모도에 의해 당시 희생자들은 29~35세 정도로 추정된다고도 했다.

이윽고 1년 넘은 발굴 조사결과 2021년 5월 18일 전주시와 전주대학교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전주지역 민간인들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됐다”며 “유해 44개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특히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 결과 탄피에 인골편이 흡착된 것으로 나타나 당시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희생됐음을 엿보게 했다고도 덧붙였다.

보고서는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며, 조사과정 및 보고서 작성 등 모든 과정에서도 마음 깊이 희생자가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밝힌 뒤 “향후 지속적인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에 대한 관심과 예산지원이 필요하며,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영면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현수 전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유해 출토 양상이 이전 조사와 유사하고 대퇴골, 두개골, 상완골 순으로 수습됐으나, 전반적으로 유실된 부위가 많고 잔존 부위 보존상태도 열악해 절반 이상의 유해가 부위 판별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2021년 5월 21일 세종시 추모의집에 당시 김승수 전주시장을 필두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안치하고 있다. <전주시 제공>
전주시는 2020년 7월 1차 유해발굴 조사에서 나온 두개골과 치아, 다리뼈 일부 등 유해34개체와 M1 소총, 권총 탄피, 벨트 등 129건을, 2021년 2차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 10개체와 유품 84점를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

이어 전주시는 2023년 4월 13일 다시 황방산 일대에 대한 발굴작업을 위한 개토제를 시작했다.

작업은 오는 7월까지 이어지며, 발굴된 유해는 감식작업을 거친 뒤 세종추모의 집에 안치될 예정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유해 발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생자 잊지 않기 위한 전시회도 개최=전주대학교박물관(관장 김건우)은 지난 2020년 10월부터 11월 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사)한국대학박물관협회 주관으로, 2020년 대학박물관 진흥지원 사업의 일환인 한국전쟁 70주년 특별전 ‘70년의 기억, 그리고 전쟁이 남긴 아픔 그리고 화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가졌다.

당시 전시는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해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좌·우의 대립이 아닌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기획됐다.

전시에서는 2019년부터 전주시의 협조로 발굴조사 중인 전주 민간인 희생자의 유품으로 발견된 허리벨트, 고무줄, 단추 등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각종 유품을 최초로 소개하면서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전시유품인 허리벨트에는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그리고 영문으로 ‘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X-Ray’촬영으로 확인, 유품과 관련된 민간인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깊은 관심을 유발했다. 이외 ‘춘’ 또는 ‘大工’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진 허리벨트 1점도 관람객의 큰 관심을 받았다.

◇땅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군산형무소 희생자들 =유해발굴과 안치까지 이뤄지고 전시회까지 개최된 전주와 달리 군산의 사정은 확연히 다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에 군산형무소는 전쟁 당시 900~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타 형무소로 이송하였다고 하는데 좌익사범의 처리는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9건을 확인했다.

특히 현재 군산비행장의 경우 미군 38전투비행단이 사용하고 있어 발굴 시도조차 힘든 상황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국 교정사’에 따르면 군산시 금광동에 위치했으며 1950년 7월 16일 일반 수형자는 일시 석방되고 중범수형자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됐다가 다시 대구 형무소로 이송됐다.

교정사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소위 좌익사범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전쟁 수복 때부터 군산형무소 근수했던 간수 진술에는 “10년 이상 징역형, 무기형, 사형을 받은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상당수가 여순사건 발생후 검거돼 군산형무소에 수감중인 이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전북일보=백세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