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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민족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북한군·유격대원 구성 ‘빨치산’
전쟁 직후 북으로 퇴각 못하고 지리산으로
1951년 1월~4월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
사살·생포 7524명…군인 등 7287명 희생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본부 있었던 화순
1950년 10월부터 백아산서 치열한 교전
2023년 09월 10일(일) 19:50
1952년 곡성경찰 소속 대원들이 빨치산 진압작전에 참여해 사로잡은 빨치산 포로들. <전쟁기념관>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

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

백아산 진압작전을 보여주는 전투경과요도.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 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

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약화됐다.

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

내무부장관 명의로 발행된 귀순허가증은 신분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2개의 허가증(왼쪽) 인쇄해 빨치산들의 귀순을 유도했다. <호남호국기념관>


◇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

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