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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내 별을 봐,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어
8월의 책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2020년 09월 03일(목) 00:00
최순임 작 ‘우리 함께 오길 잘했어’
생텍쥐페리는 왜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면서 제목을 ‘어린왕자’로 달았을까? 우리의 눈길은 일반 명사인 ‘왕자’보다는 형용사 ‘어린’에 머문다. 형용사가 특징을 드러내는 데에는 일반 명사보다 훨씬 재주가 좋다.

니체에게서 어린이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인간은 주인이 부과한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인에 절대 복종하는 낙타에서, 다른 사람이 부과한 짐은 절대지지 않고 자신 만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하는 사자를 거친 후 순진무구함에 빠져 삶을 놀이로 승화하는 어린이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니체에게 어린이는 새로운 출발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이자, 성스러운 절대 긍정이다. 이 성스러운 긍정으로만 창조라는 유희를 수행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 말기 사상가인 이탁오는 탁월해지려면 반드시 ‘동심’(童心)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심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처음 갖는 마음으로 모든 거짓이 끊겨 있는 순진무구한 상태다. 이탁오에게서 어린이는 사람의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동심은 모든 제약과 굴레를 뚫고 전혀 새로운 곳을 지날 수 있게 한다.

방정환이 1930년에 남긴 글도 꼭 봐야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놀이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진하게 태어난 어린이는 규칙과 숫자를 배우면서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세계를 보여 지는 대로 볼 수 있던 마음이 봐야 하는 대로 보도록 상자에 갇힌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는 항상 ‘어린이’가 아니라 ‘아직 덜 어른’으로 치부된다. 사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린이에게서 ‘어린이의 마음’을 뺀 자리에 ‘어른의 마음’을 쑤셔 넣는 일이다. 창조적 유희를 막는 질긴 폭력이다. 어린이는 ‘아직 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 자신일 뿐이다.

이제는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을 돌려줘서 어린이가 어린이로 자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것이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않는 일이다. 어린이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에 외부의 지침이 없을 때 더 성스럽다. 낙타처럼 정해진 궤도를 돌지 않고 스스로 도는 어린이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최초의 움직임을 감행하는 순수한 충동이 저장되어 있다. 이 충동은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해 보려는 새로운 동작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심장은 모험심을 꼭 안고 뛴다.

생텍쥐페리는 새(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건너다녔다. ‘건너가기’는 모험이다. 그는 모험을 각자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숭고한 삶의 완성이 모험 없이 가능할까? 지금 자신의 현재를 개선하고 싶은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 주조해 낸 과거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참회도 하지 않고 니르바나를 원하거나 회개도 하지 않고 천당에 가려는 것과 같다.

최순임 작 ‘내 별을 봐,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어’
대부분의 모험은 떠나기다. 회개도 참회도 다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는 떠나기다. 자기보다 좀 더 클까말까 한 별에 살던 어린왕자는 친구를 가지고 싶었다. 그가 지구라는 별에 와서 여우를 만나 인식의 지평이 열리고 스스로 뱀에게 물려 완성의 경지로 진입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이미 친구를 갖고 싶어 한 그 염원을 도약대 삼아 B-612를 떠나는 모험에 이미 다 들어있었다. 이 ‘떠나기’야말로 어린왕자가 도달한 완성의 경지를 모두 품은 건강한 씨앗이다.

모험심은 호기심의 거친 숨결이다. 어린왕자는 한번 물어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을 정도로 호기심 덩어리였다.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을 돌려주어 어린이로 자랄 수 있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도 소명으로 키워질 자신 만의 호기심을 마치 사막의 샘처럼 품고 있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이 보물 같은 샘을 잃은 어른들은 급행열차에 올라타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찾으러 떠나는지 모르지만, 어린이들만은 자기들이 무엇을 찾는지 안다. 어른들 눈에 하찮아 보이는 헝겊인형이라도 어린이는 자신만의 샘을 출렁거리게 하여 오랜 시간을 들여 찾는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중요한 것, 자신에게 유일한 것으로 창조해내고 만다. 자기만의 별을 기어이 찾아 갖는다.

‘마음대로 써도 되는 오십삼 분이 있다면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겠다는’ 정성스런 태도는 ‘처음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몫이다. 바로 어린 왕자의 마음이다. 이런 사람은 하찮은 헝겊 인형을 찾는 일에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듯’ 시간을 들여 마침내 그것을 중요하고 유일한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순간 자기가 별이 된다. 어린왕자도 “백열한 명의 왕, 칠천 명의 지리학자, 구십만 명의 사업가, 칠백오십만 명의 주정뱅이, 삼억천백만 명의 허영심 많은 사람 등 약 이십억쯤 되는 어른 들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잠시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마음’을 놓쳤다 .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가진 꽃은 겨우 평범한 장미꽃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일하였던 장미꽃을 여러 장미꽃 가운데 하나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그는 풀밭에 엎드려 울었다.” 고유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하던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고유함이 일반성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하면 어떤 누구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속에 한 명으로는 자기가 아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로는 자신에게 특별할 수 없다. 자기는 고유하고 유일할 때만 자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절망을 느끼는 것마저도 축복의 마지막 줄에 설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우리 속에 한 명으로 존재해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때의 자신을 자기라고 생각하며 존재적 희열을 포기하고 심리적 위안으로 만족해버리기 때문이다. B-612를 떠나는 정도의 모험심을 가진 사람이라야 이런 존재적 각성이 가능하다.

이런 존재적 각성이 준비된 자들에게는 선물처럼 혹은 데미안처럼 ‘여우’가 나타난다. 이것은 행운이지만, B-612를 떠나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다. 여우를 통해서 어린왕자는 ‘길들여짐’을 배우고, 이것이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난 네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성스러운 절대 긍정에 이른다.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의 ‘스스로’를 회복하였다. 성스러운 긍정에 도달한 어린왕자는 무엇이거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뱀에 물리는 ‘결단’을 내린다. 스스로 죽음을 초청하여 완성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지구는 이십억쯤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다. 이곳은 사랑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곳이다. 수없이 많은 별들 속에서 길들여지며 나만의 별을 찾고, 그 별을 특별하게 대하고 책임을 지면서 나도 별이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할 곳이다.

어린왕자에게 뱀을 스스로 초청하여 죽음이라는 ‘완성’의 결단을 내리게 한 생텍쥐페리는 비행기로 편지를 나르는 우편배달부였다. 그는 자신이 싣고 가는 삼만 통의 편지를 단순한 배달품목으로 보지 않고 매우 귀중한 것으로 다뤘다. 우편물에 스스로 길들여지고 책임을 지는 특별한 태도를 가진 것이다. “우편물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애인 삼만명을 살릴 수 있으므로. 애인들이여 참아라. 석양빛을 헤치고 그대들에게 가노라”(‘남방우편기’) 뱀에 물린 어린왕자가 세상에 다시 내려와 우편배달부를 한다면, 석양빛을 헤치며 애인 삼만 명을 살릴 것이다. 마치 내 별을 찾아서 나도 별이 되면 “빛나는 전구 오억 개”를 갖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사막으로 굳이 나가지 않아도 뱀에 물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막에만 샘이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안에 숨겨진 샘을 찾기만 하면, 모든 것과 서로 유일한 관계로 길들여질 것이다. 애인 삼만 명을 살리는 별로 반짝일 것이다. 사실은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별을 봐.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어.

<최진석 새말새몸짓 이사장>



※ ‘어린왕자’ 북토크 내용은 광주일보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watch?v=xU4_TAsCLq4&autoplay=1&autohide=1&html5=1)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9월에 함께 읽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광주일보 9월 1일자 16면 참조(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98886000703140315)>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