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먼데이와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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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먼데이와 뮤지컬
2008년 10월 19일(일) 23:59
1987년 10월19일 월요일. 뉴욕 링컨센터의 수석연출가인 버너드 거스턴(Bernard Gersten)은 하루 종일 담배를 물고 살았다. 이날은 미 다우지수 사상 유례없는 22.6%의 폭락장을 기록한 ‘블랙먼데이’. 월스트리트의 증권맨도 비즈니스맨도 아니었지만 거스턴의 가슴은 이들 보다 더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유는 뮤지컬 ‘애니싱 고스(Anything goes·무엇이든지 된다)’ 때문이었다. 거스턴은 1934년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싱 고스’를 다시 무대에 올리기 위해 10월 19일 초연을 목표로 3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1934년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애니싱 고스’는 뉴욕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초호화 여객선 ‘S.S American’를 배경으로 승객들의 유쾌한 헤프닝을 담은 코믹 뮤지컬. 1934년 대공황때에도 무려 450차례나 공연된 ‘롱런 뮤지컬’이었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증시폭락으로 오랫동안 공들여온 뮤지컬이 간판을 내려야 할 처지에 몰린 것이다. 수많은 실직자가 거리로 쏟아지는 판에 한가하게 뮤지컬이라니. ‘브로드웨이의 미다스 손’인 거스턴이 머리를 굴려봐도 ‘쪽박 공연’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애니싱 고스’는 예상을 깨고 대박을 냈다. 첫 공연이 열린 링컨센터 부설 비비안 버몬트(Vivian Beaumont)극장은 개막 1시간 전부터 밀려드는 관객들로 붐볐다. 총 1천84개의 전 좌석은 공연기간 1년 내내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만 뉴욕시민들은 주린 배를 달래며 티켓부스로 향했다.
최근 미국 월가를 흔들고 있는 금융위기로 자선단체와 비영리 문화재단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뉴욕현대미술관이나 링컨센터 등은 혹여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이 줄어들지 않을까 애를 태우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우로 끝날 것 같다. 메릴린치 증권을 인수한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는 “기부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명예로운 위임(honoring commitment)”이라며 메릴린치의 뒤를 잇겠다고 약속했다.
기금모금의 귀재이자 ‘펀드레이징을 위한 핵심가이드(Yours for the Asking:An Indispesable Guide to Fundraising and Management)’의 저자인 레이놀드 레비(Reynold Levy)에 따르면 지난 50년대 이후 수차례의 불경기 속에서도 미국 기업들의 기부는 평균 1% 감소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국내 문화예술계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크고 작은 공연행사를 후원해 왔던 유수기업들이 경기침체를 이유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예정된 후원을 ‘없었던 일’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공연장과 전시장은 관객들의 발길이 부쩍 줄어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다. 1987년 한편의 뮤지컬을 보며 10월 블랙먼데이의 암울한 밤을 달랬던 뉴요커들의 여유가 새삼 부러운 요즘이다.
/박진현 문화생활부장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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