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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 무거운 책임 - 윤현석 정치부 부국장
2023년 12월 19일(화) 23:00
중국 고전을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그가 한 번씩 보내주는 글귀는 매번 정치적·사회적 이슈와 연관돼 있는데, 이번에 보내준 것은 사기열전 제1편 ‘백이열전’에 있는 내용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1975년 10월 동서출판사가 발간한 최인욱·김형수 번역 사기열전을 발견하고는 줄곧 손에서 안 놓고 열심히 읽었던터라 그 문장 그대로가 기억이 났다.

“이른바 하늘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어떤가.” 사마천은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숙제,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이지만 자주 끼니를 잇지 못해 젊어서 죽은 안회와 포악 방종하게 살다가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목숨을 온전히 누리고 산 도척을 비교하면서 “이러한 일은 나를 아주 당혹케 한다”고 토로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가 과연 있는 것인지 최고의 역사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세상은 안 바뀌고 이름만 바뀌는



전두환과 그를 따르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20·3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광범위하게 인기를 얻으며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넘어설 기세다. 영화는 권력에 눈이 먼 소수의 군인들이 온갖 모략을 써 저지에 나선 일부 군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며 ‘성공한 쿠테타’를 만들어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특히 1979년 말 권력 공백기에 일어난 쿠테타에 당황한 군 고위급과 고위 공직자들이 우왕좌왕하며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결정하지 못한 순간들이 관객들을 몰입하게 했다. 몇몇 관객들은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 영화 중간에 뛰쳐나가기도 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은 고대 그리스였다. 기원전 2000년대부터 시작해 기원전 31년 로마에 합병되기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 스파르타로 대표되는 최대 1000여개의 도시국가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 도시들은 때로는 연합해 외적을 무찌르고, 한편으로는 서로 경쟁을 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고대 그리스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정치 제도의 창안과 적용이었다. 왕정, 귀족정, 참주정, 민주정 등 거의 모든 정치 제도를 운영했고 노예제도, 여성 차별 등 여러 한계는 있었지만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전형을 후세에 알려줬다.

세습과 통혼을 통해 권좌에 앉았던 왕, 봉건영주들과 달리 주권자의 투표를 통해 자리를 얻은 선출직 정치인은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데 있어 몇 가지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우선 특정 계층·세력·지역의 기득권을 타파해 국민 대다수의 행복한 삶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직 사회 내부의 혁신을 이끌어 무사안일과 권위주의를 타파해야하며, 눈앞의 이익보다는 미래 국가·지역공동체를 지속가능하도록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야 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무력을 가진 군대와 함께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을 감시·견제해 그들이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국민을 위해 봉직하도록 해야 하는 책임 역시 갖고 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검증하면서 다양한 지식 함양, 주권자의 의견 수렴, 전문가·시민단체 등과의 교류 등 정치인이라면 해야 할 일은 끝도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정치인 중 상당수가 자신의 책무는 잊고 노력과 반성도 없이 특정 세력의 지지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미래를 외면하거나 협상과 중재를 통해 모두를 위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상대방을 적대하는데만 열을 올려 ‘정치 실종’을 초래하고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한 여배우의 대사처럼 “세상은 안 바뀌고 이름만 바뀌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늘의 도리는 과연 옳은 것인가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에 의해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걸었던 기대는 너무도 컸다. 무엇보다 여당이 국회 과반을 훌쩍 넘는 180석을 차지해 여러 분야에서 혁신이 가능했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약속했던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 국가 균형발전, 부동산 안정, 세제 개혁 등 거의 모든 현안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운영에 관여했던 정치인들이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처절한 자기 반성과 철저한 원인 분석, 실패의 반복을 막을 구체적인 대책 수립이었다.

소임을 다하기 위해 정치인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늘의 도리까지 알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정치인의 도리를 알고 실천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으면 한다. 다음 총선에서는 그런 정치인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