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겨울 견뎌 내는 인동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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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겨울 견뎌 내는 인동초처럼

2020년 10월 07일(수) 00:00
홍 행 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요즘 우리 정치권을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3개월여 앞둔 1987년 9월 8일의 광주역 앞 광장이 떠오르곤 한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대표가 구름처럼 몰려든 수십만 명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독재 정권을 이긴 것은 국민이요, 광주 시민이요, 망월동의 넋’이라며 사자후를 토해 내던 그 현장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채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던 군중들의 열띤 표정, 귀청을 찢을 듯 퍼져 나가던 크고 날카로운 확성기 소리,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그날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뚜렷이 남아 있다.

당시 노태우·김영삼 후보를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뤘던 김대중 후보는 광주역 광장에서 즉석 유세를 끝낸 뒤 곧바로 망월동 5·18묘역을 찾아 그 유명한 연설을 한다. “나는 혹독했던 정치의 겨울 동안 겨울을 이겨 내는 강인한 덩굴풀 인동초(忍冬草)를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동트는 민주와 민중의 새벽을 앞장서 열어 갈 것입니다.”

이 연설로 김대중은 ‘인동초’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우리 국민은 김대중을 ‘엷은 이파리 몇 개로 춥고 모진 겨울을 견뎌 내고 마침내 새봄에 꽃을 피우는’ 인동초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김대중과 함께 군부독재의 엄혹한 세월을 견뎌 온 호남은 ‘인동초의 고향’으로 불리게 된다. 김대중의 정신을 계승한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소셜미디어에 “국민의 마음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히 인동초이며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추모 글을 올렸다.



또다시 김대중을 생각하며



20대 대통령 선거를 1년 5개월여 앞둔 지금 또다시 김대중을 떠올리는 이유는 정치의 새봄을 맞아 ‘인동초’로 대표되는 호남의 정치가 비로소 주변을 벗어나 중앙에서 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권에선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국무총리를 비롯해 호남에 뿌리를 두거나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사들이 당·정·청의 요직에 대거 포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국정원장과 국방장관뿐만 아니라 검찰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는 ‘빅 4’ 자리를 모두 호남 출신이 채우고 있다. 국회의원의 경우도 지난 4월 치러진 제21대 총선에서 서울 전체 지역구 당선자의 35%인 17명, 경기 당선자의 29%인 17명, 그리고 인천 당선자의 46%인 6명이 호남 출신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호남이 한국 정치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서진(西進) 정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호남에서 외면받는 정당엔 미래가 없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서진 정책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당의 미래가치를 담는 새로운 정강 정책엔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명문화됐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난 5월18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고, 81세 고령의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지난 8월18일 5·18민주묘지를 찾아 “그동안의 잘못된 언행을 사죄한다”며 광주 시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주역 앞 광장에서 처음 선보인 김대중의 ‘인동초’가 34년 만에 정치의 중앙 무대에서 여야를 아우르며 화려한 꽃을 피워 내고 있는 셈이다.



호남 정치 르네상스 견인을



하지만 호남 정치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군부 독재에 맞서 5·18 광주정신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견인해 내고 촛불 혁명을 이끌어낸 호남은, 이제 진보와 보수로 갈려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작금의 ‘대결 정치’를 끝장내고 ‘제2의 정치 르네상스’를 시작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깨달아 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넣어야 한다며 개헌을 언급한 것도, 보수 야당이 정강 정책에 5·18정신 계승을 명문화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전북대 초청 강연에서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서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함께 ‘상인적 현실감각’이 필요하다. 둘 중에 하나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호남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념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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