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을 넘어 ‘희망의 4월’로 - 박성천 문화부장·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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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을 넘어 ‘희망의 4월’로 - 박성천 문화부장·편집국 부국장
2025년 04월 02일(수) 00:00
소설 ‘25시’의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1916~1992)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로 비유한 바 있다. 문인들이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다. 1974년 ‘문학사상’ 주간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의 초청으로 방한했을 당시, 게오르규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독일군 소속으로 잠수함에서 수병생활을 했다. 당시 루마니아는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때라 잠수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산소측정이었다. 동물 가운데 산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토끼가 유용하게 활용됐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토끼는 사람보다 대략 여섯 시간 먼저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게오르규는 어느 날 잠수함 속 토끼가 산소 부족으로 죽게 되자 새로운 임무를 맡는다. 계급이 낮은데다 해저

‘시인은 잠수함 속 토끼 같은 존재’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자신에게 토끼와 같은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잠수함 바닥에서 생활하며 산소의 유무를 판별하는 ‘마루타’의 처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게오르규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 잠수함 내부의 산소가 부족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인은 잠수함 속 토끼와 같은 존재’라는 게오르규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인들은 당대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먼저 감지해 위험 신호를 행동으로 표출하거나 작품으로 구현했다. 옛 소련 체제의 폭압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으로 비판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조선시대 단종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찬탈한 세조에 맞섰던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기개와 시문은 후세들에게 감동을 준다. 일제강점기 17번이나 옥고를 치르며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이육사 시인의 독립운동 의지와 강직한 시혼도 울림을 준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가 오는 4일 오전 11시에 내려진다. 그동안 선고 지연과 맞물려 사유와 결과에 대한 무성한 설(說)과 시나리오가 난무했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14일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이 접수된 이후 가장 오래 심리를 이어왔다. 접수일 기준 노무현 전 대통령 63일, 박근혜 전 대통령 91일이 걸린 것에 비해 역대 최장 기간이 소요됐다. 그 사이 문인들은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본능적으로 탄핵 심판이 지연된 데 따른 나름의 날카로운 통찰을 했다. ‘한 줄 성명’을 발표하거나 릴레이 천막농성을 펼치는 등 ‘원고지를 떠나 온몸으로 글을 쓰는’ 결행을 한 것이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소설가를 비롯해 문인 414명은 짧지만 강렬한 문구로 파면을 촉구하는 ‘한 줄 성명’을 발표했다. 한강 소설가는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라고 썼다. 김혜순 시인은 “우리가 전 세계인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해다오, 제발”이라고 적었으며, 김애란 소설가는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판결을 촉구합니다. 시민들과 함께 법의 최저선을 지켜주십시오”라고 촉구했다.



4·19혁명 쟁취한 자랑스러운 역사

한국작가회의도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윤석열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입장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온갖 궤변과 거짓, 왜곡으로 시종하는 윤석열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심판을 지연·회피하고 있다. 졸렬한 행태가 반복될수록 윤석열은 그저 비루한 내란 수괴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우리의 입장은 더욱 확고해졌다”고 주장했다.

광주전남작가회의도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는 릴레이 천막농성을 5·18민주광장에서 진행하고 있다. 목포작가회의, 순천작가회의, 여수작가회의 등 지역 작가회의도 참여할 만큼 작가들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김미승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은 “평온한 일상에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국민은 그날(지난해 12월 3일) 이후 밤잠을 설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일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모두가 자격 미달인 자가 대통령이 되어 미숙한 판단으로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헌재의 선고 당일인 4일에 쏠려 있다. T.S. 엘리어트는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이 문구는 당초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아픔을 비유한 것이지만 불의와 부조리, 전쟁의 참혹한 세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부정 선거에 맞서 4·19혁명을 쟁취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잔인한 4월’이 될지 ‘희망의 4월’이 될지는 전적으로 재판관들 결정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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