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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혁명 40년]②“샤에게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
美의존·서구식 개혁 추진한 왕정, 국민저항 무력진압하려다 붕괴
美·이란 단교한 美대사관인질사건 계기로 ‘이슬람원리주의’ 확산
2019년 02월 10일(일) 16:53
1978년 10월 테헤란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AP=연합뉴스자료사진]
“샤(왕)에게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
1977년부터 본격화한 이란의 팔레비 왕정 반대 시위에 참여한 이란 국민이 마치 주문처럼 외쳤던 이 구호는 이란 이슬람혁명의 방향과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제어’라고 할 수 있다.
이란 이슬람혁명은 1979년 2월 완성됐으나 그 시작은 1963년 팔레비 왕정이 추진한 ‘백색 혁명’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인 백색혁명은 표면적으로는 대지주의 토지 국유화와 공평한 분배, 여성의 참정권 부여 등 이란을 전근대에서 현대 국가로 변모시키는 혁신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팔레비 왕정에 백색혁명을 추동한 배후는 미국 존 F. 케네디 정부였다.
19세기 말 이란 카자르 왕조부터 1950년대 초까지 이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외세는 영국과 러시아였다.
특히 영국은 부패한 카자르 왕조와 결탁해 원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은 물론 철도, 담배 등 각종 사회기반 시설의 이권을 손에 넣었다.
영국은 카자르 왕조에 고리의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이란 경제를 통제하게 된다. 카자르 왕실은 이 대가로 유럽 여행 경비와 편의를 받았다고 하니 외세의 이익 침탈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1923년 팔레비 왕정 탄생의 배경이 됐다.
영국의 영향력은 팔레비 초대 국왕 레자 샤 시절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반발해 1950년 모함마드 모사데크 총리의 석유 국유화 정책이 추진되고 2대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가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뒤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은 원유 대국인 이란의 자립 노선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의 이란 진출을 제지해야 했고, 이란의 막대한 원유 자원도 통제해야 했다.

1959년 팔레비 왕정의 모하마드 레쟈 샤와 왕비 파라 디바의 결혼식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1953년 모사데크 정부를 축출하는 왕정 복원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의 배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비밀정보국(SIS)이었다.
모하마드 레자 샤가 쿠데타로 권좌에 복귀한 뒤 영국을 밀어내고 미국이 이란의 내정에 가장 강력하게 개입하는 외세가 된다.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란에 이식해 전통적 기득권인 이슬람 종교세력을 와해해 왕정을 강화하려 했다. 이슬람 종교세력은 19세기부터 20세기를 거치면서 이란이 세속주의 근현대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외세에 의존하는 왕실과 항상 대립했다.
자신을 계몽 군주로 과시하려는 팔레비 왕정과 서구식 개혁으로 이란을 변화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정치적 결정이 백색혁명이었던 셈이다.
이런 백색혁명의 골자가 외세와 서구식 개혁을 반대하는 종교세력을 자극한 것은 당연했다.
백색혁명으로 종교세력이 보유한 토지와 이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이슬람 성직자들은 행동(반정부 시위)으로 맞선다.
왕정의 개혁조치와 종교세력의 대결에서 일반 대중은 종교세력의 편을 들었다.
당시 이란 사회에선 유력 성직자가 여론을 주도하는 힘이 강했고, 백색혁명이 겉으로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개입을 강화하는 ‘꼭두각시 개혁’이라는 불신이 맞물리면서였다.
왕실에 대한 불신은 팔레비 왕정의 악명높은 억압과 권위적 철권통치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팔레비 왕정은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원으로 ‘사바크’라는 초법적인 친위 정보 조직을 조직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숙청했다.
정치적인 이유와 더불어 이란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도 대중의 왕정 타도의 동력이 됐다.
1970년대에 들어 팔레비 왕실과 미국은 원유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이 국부는 이란 서민층까지 낙수효과를 내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이란의 상위 10% 부유층이 국내총생산의 40% 이상을 장악했다.
왕실의 곳간은 날이 갈수록 채워졌지만, 서민층은 경제적으로 붕괴했다.
팔레비 왕정은 그러나 이런 불만과 불신을 표출하는 반정부 시위에 총으로 강경하게 진압했다.
팔레비 왕정의 반대파 탄압이 거셀수록 이에 정면대응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인기는 높아졌다.
그가 1963년 6월 곰에서 한 연설에는 10만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이 연설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7세기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가) 예언자(무함마드) 일족을 죽인 것처럼 곰의 페이지예 신학교 학생들과 신도를 팔레비가 공격했다. 그 배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고 연설했다.
이란 종교세력은 팔레비 왕정을 미국과 등치해 외세의 침탈에 분노가 누적된 이란 국민을 거리로 끌어내 세계 유일의 신정일치 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1979년 11월 주(駐)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이란 대학생들이 점거, 외교관 등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고 444일간 대치한 사건도 반미 정서를 원동력으로 한 이슬람 혁명의 여파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슬람혁명 직후 여성에게 강제로 히잡을 쓰도록 한 정책 역시 혁명 전까지 서방에 밀착했던 왕정에 대해 반동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반미 시위는 식지 않고 있으며 시위 현장에서는 ‘마르그 바르 엄메리카’(미국에 죽음을)라는 구호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1977년 이란에서 반정부 세력이 다시 힘을 얻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그해 출범한 지미 카터 미국 정부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카터 정부는 인권을 강조하면서 팔레비 왕정에 정치범과 사상범에 대한 탄압을 자제하라고 주문했고 그 덕에 이란에서 반정부 운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또 카터 대통령은 주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와 인질 사건이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해 재선에 실패한다.
이 인질 사건으로 미국은 이란과 단교하고 경제 제재를 부과한다. 중동에서 가장 친미적이었던 이란이 최대의 반미 국가로 급변했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중동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이란 이슬람혁명은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란의 경쟁국 사우디아라비아가 히잡으로 대변되는 원리주의 성향의 이슬람 사상인 와하비즘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1979년 11월 20일 발생한 메카 대사원 점거 사건이었다.
이슬람 성지 메카 대사원을 무장 점거한 장본인은 이크완(사우디의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무장조직)의 일파로, 2주일에 걸친 점거와 도주 과정에서 약 240명이 숨졌다.
이 점거 사건의 직접 동기는 다름 아닌 이란 이슬람혁명이었다. 1979년 2월 승리를 선언한 이슬람 혁명의 기세를 타고 그해 11월 4일 이란 대학생 시위대가 세속적 외세의 상징인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
이란과 미국의 국교 단절을 초래한 이 사건은 사우디, 아프가니스탄에서 세속권력에 대항하는 강경한 이슬람주의를 확산하는 결정적 사건이 됐다.
한때 사우디 알사우드 왕가와 협력 관계였던 이크완은 사우디 왕실이 점점 세속화한다는 불만이 높아지던 터였고 이란에서 벌어진 급변 사태에 자극돼 메카를 점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란의 신정체제 수립과 메카 대사원 점거 사건에 당황한 사우디 왕실은 엄격한 이슬람주의로 회귀한 이란과 체제 경쟁을 벌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우디도 히잡 의무 착용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등 보수적 종교 색채가 짙어졌다.
중동의 패권과 이슬람 지도국의 지위를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두 나라가 오히려 서로 닮은꼴이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옛 주테헤란 미국 대사관 건물의 반미 벽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