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화가’ 손상기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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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화가’ 손상기를 기억하자
2014년 02월 05일(수) 00:00
몸집보다 큰 봇짐을 머리에 인 어머니와 그 옷자락을 잡아끄는 아이(‘나의 어머니’), 성냥갑을 무질서하게 포개놓은 듯한 판잣집(‘난지도’), 허리가 꺾인 채 화병에서 말라져 가는 꽃(‘해바라기’)….

가까운 과거에는 흔해 빠졌을, 유화의 오브제로 선택하지도 않았을 이미지들이 4개의 전시실에 펼쳐졌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거나, 혹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들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어머니’는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를 얹어놓은 것 같다. 이 어둡고 암울한 그림에 화가는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무겁고 무겁다/인생 삶/짐이 무겁고 아이가 무겁고 마음이 무겁고/ 고달픈 것/그들을 도우소서.”

지난달 26일 여수예울마루에서 막을 내린 ‘손상기 25주기전-고통과 절망을 끌어안은 예술혼’은 우리가 지나온 삶의 궤적들을 반추하게 하는 자리였다. 그의 25주기를 맞아 여수시와 손상기 기념사업회가 기획한 전시는 시대별 작품(127점)들을 아우른 첫 귀향전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여수에서 태어난 손상기(1949 ∼1988)는 세 살 때 앓은 척추만곡증으로 성장이 멈춘, 키가 140cm 정도인 곱추화가다. 1979년 원광대를 졸업한 직후 상경한 그는 사글셋방에서 지독한 가난과 주변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창작에 전념했다. ‘예술혼에서 짜낸 진액’으로 그린 그림들은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낙이었다. 하지만, 울혈성 심부전증 진단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다 1988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짧은 생애에도 80년대 개발 열풍에 휩싸인 서울을 풍자한 ‘공작도시‘ 시리즈 등 400여 점을 남겼다. 시인 이성부는 “손상기는 붓과 나이프로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삶을 형상화 한 ‘문제적 화가’”라고 평했다. 하지만, 손상기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지게 된 건 불과 10여 년 전부터. 일찌감치 그의 작품성을 알아본 서울 샘터화랑과 전혁림 화백 등 몇몇 미술계 원로, 손상기 기념사업회가 고군분투한 결과다. 덕분에 근래 몇 년 새 국내 미술시장에서 최고가로 거래되는 블루칩 작가로 떠올랐다.

비록 전시는 끝났지만 손상기 재조명 작업은 현재 진행중이다. 여수시가 기념사업회 등과 함께 ‘손상기 미술관’ 건립을 논의중이고 드라마틱한 그의 삶을 영화로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런 분위기가 ‘반짝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길 바란다.

특히 ‘손상기 미술관’은 여수는 물론 오는 2015년 개관예정인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랜드마크로서 경쟁력이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손상기 25주기전’을 광주시립미술관에서도 개최해 ‘바람’을 이어가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문화의 시대, 지역 예술가를 콘텐츠로 키워내는 건 지자체의 ‘행복한’ 의무다.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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