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앉아 - 박홍근 건축사·공간복지생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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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앉아 - 박홍근 건축사·공간복지생각 대표
2025년 09월 17일(수) 00:00
전라남도 구례 지리산 자락 화엄사 깊숙한 곳, 작은 암자 구층암(九層庵).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이 암자가 나에게 주는 울림은 의외로 크다. 그 비밀은 기둥에 있다. 구층암은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심지어 돌멩이가 박힌 나무를 다듬지 않은 채 기둥으로 세웠다. 건축물에서 기둥의 기본적인 역할은 구조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지만 단순한 구조재만은 아니다. 건축물의 의장적 요소와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곳의 기둥은 자신의 아픈 상처인 흠까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어찌 보면 ‘흠’이 ‘흥’을 유발하고 있다. 인위적 완벽을 추구한 대신 자연의 불완전함을 승화시키고 받아들인 선택이다. 건축으로 구현된 불교적 수행 정신 같기도 하다.

구층암의 역사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경덕왕 시기 ‘구층대’라 불리며 수도처로 쓰였고 조선 인조 때 중창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가 이어졌다. 1899년에 쓰여진 매천 황현의 ‘구층암 중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 기록 어디에도 모과나무 기둥 이야기는 없다. 지금의 기둥은 20세기 초, 보수 과정에서 들어섰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왜 하필 모과나무였을까?

모과나무는 단단하고 뒤틀림이 많아 가공이 쉽지 않다. 건축재로 흔히 쓰이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구층암은 불편함을 택했다. 현재도 암자 마당에는 세 그루의 모과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모과나무 기둥은 맞은편 건물에 1개가 있고, 구층암에는 2개가 세워졌다. 불교에서 1은 태극이요, 2는 음양을 상징한다. 그 합인 3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죽은 모과나무 기둥 3개와 살아 있는 나무 3그루, 반복되는 숫자 3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동시에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완전함, 조화, 안정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의 숫자이기도 하다. 단순한 모과나무 기둥 3개가 아니라 수행자의 사유를 담아낸 건축적 장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건축은 누구의 뜻이었을까. 기록은 없지만 수행자의 철학과 도편수의 장인 정신이 만난 결과일 것이다. 스님이 “자연 그대로 세워라”라 했을 때 도편수가 그 뜻을 구조적·공간적으로 잘 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수행자의 철학과 도편수의 재능, 그들의 신념과 현실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구층암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불교적 정신세계를 구축한 ‘삶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화려한 외형과 즉각적 효율에 치우치곤 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반듯하고 매끈하며, 화려하고 세련된 것만이 좋은 건축이라 믿는다. 그러나 구층암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좋은 건축은 무엇인가? ‘외형이 아니라 정신이다’라고 묵묵히 말한다.

건축주는 어떤 철학을 품고 있는가? 건축가는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 과정에 진정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철학과 장인 정신이 만날 때 좋은 건축이 가능할 것이다.

지리산 자락 작은 암자, 원래 모습 그대로인 모과나무 기둥은 오늘도 묵언 수행을 이어가는 것 같다. 불완전함까지 품어 완전함을 추구한 기둥,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건축의 본질을 찾아가는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크고 화려한 건축이 아니라 더 깊은 정신을 담은 건축이다. 구층암은 그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앉아 공간이 주는 잔잔한 매력, 그 공간을 누리는 인간의 행복, 시간 속에서 완성 되어가는 건축의 힘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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