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주머니 속의 사랑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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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주머니 속의 사랑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09월 15일(월) 00:00
고샅을 걷는다. 장원봉 줄기가 공룡 등뼈처럼 쭉쭉 뻗어 나뉜 고샅, 퇴근길, 두암동이다. 1동 2동 3동으로 나뉜 두암동 고샅. 눈으로는 붓질하고 혀로 핥듯 공룡 갈비뼈 사이 두암동을 조심조심 발바닥으로 느낀다. 그러면 무등산 등줄기들이 으라차차!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낮고 낮은 집, 높아야 겨우 2층. 대문과 지붕도 보고, 지나가는 고양이도 본다. 감춰진 것들이 여기서는 감춰지지 않는다. 양발과 이불은 물론, 속옷들도 속살처럼 빨랫줄에 걸려있다. 조금만 귀 기울여도 벽 너머 웃는 소리가 펄럭거린다. 길목의 꽃들이 퇴근하는 이들을 보고 웃는다. 누구 것도 아니다. 지붕과 대문에 무성한 꽃도 나무도 주인 것이라기보다 이웃 사람, 보는 이의 것 같다. 보기 드문 낯선 비파나무, 손바닥을 펼친 듯한 방풍나물….

그렇지! 여긴 거대한 숲이었지. 아니지! 허허벌판 사막이나 망망대해 그 어느 심해였을 게다. 그러니 저 가시를 드러낸 선인장이나 해풍을 먹고 자란 나무들이 옥상에 화석처럼 있는 게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이른 곳, 갑낭…. 참 이름이 생소해서 또 멈춘 곳, 두암동 갑낭(匣囊) 경로당

주머니 속으로 들어선다. 갑낭 안은 호주머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다. 몇 해 전 할아버지들은 없고, 먼저 퇴근한 네댓 명 할머니들이 정겹게 코를 박고 있다.

영감 병문안 갈 일 걱정하는 마량댁이 한숨을 쉬자, 곧 죽어도 있는 영감이 좋다며 나주댁이 전복죽이라며 보퉁이를 내민다. 그 옆에서 널배를 탔던 보성 꼬막댁이 마늘을 까다 말고 작은 봉투를 마량댁 주머니에 쑤셔 박는다.

“바다만 그랬가니, 우리 동네도 징글징글했지, 낮에는 군인, 밤에서 산 손님!”

구례 연파댁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마량댁에게 내민다.

갑낭이 무어냐고 물으니, 임금님 옥쇄주머니란다. 그러면서 자식처럼 반긴다. 뿌리까지 뽑혀 이곳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 제 몸뚱이만 이식하는 게 아니라 제 삶을 송두리째 옮겨심었다. 뿌리를 쪼개는 나눔은 나눔으로 더 커지는 일이다. 어쩌면 고추, 상추, 호박 모종을 나누고 생강, 담배도 나누고 밥도 나누고 삶과 죽음도 나눈 사람들이다.

생의 묵직한 가지들을 다 나누어 주고 헐렁해진 사람들. 부모에게 간과 쓸개를 내어주고 커가는 자식들에게 심장을 주고 이웃에게 피도 나눠주고 결국 버려진 소라껍데기처럼 텅텅 빈 주머니, 쪼글쪼글 허름한 몸만 남은 이들이다. 굽은 허리와 절뚝거리는 다리, 침침한 눈과 들리지 않은 귀….

“그래 맞아, 갑낭이 천국이여! 여기 아니면 갈 곳은 딱 한 군데여?”

“먼저들 가, 나는 더 놀다 제일 늦게 갈 거니까!”

“아니지, 언니가 먼저 가야지”

말에 따뜻함이 가득하다. 당기고 밀치며 웃는 미소가 영락없는 소녀다. 갑낭, 여기 올 수 없으면 요양원뿐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갑낭에 막걸리 두 병 넣고 빠져나온다. 두암2동, 고샅에 핀 꽃들이 흔들거린다. 길도 나뉘고 집들도 나뉘고 그런데 사람만은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옥상 방풍나물, 흔한 게 아니다. 누가 섬마을에서 고향을 나눠왔을까.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아무개가 자고 나니 풍기가 있다고 해서 얼른 옥상에 올라가 방풍을 둘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렇게 방풍은 넷으로 여덟으로 이 집 저 집, 바람 따라 나뉘었을 것이다.

어쩜 저 비파나무도, 노랑 장미도, 그렇게 쪼개지고 나뉘었는지 모른다. 온기는 그렇게 고샅과 고샅 사이를 나누어도 옮겨간다. 두암동에서 사랑은 아무리 나눠도 작아지지 않는 나누기다.

퇴근길 고샅에서 운 좋게 옛날을 만난다. 생의 보검 같은 온기와 나눔, 그 옛것들이 있는 곳이다.

깊숙이 보검을 감춘 곳이라는 갑낭, 1대 노인회장이 작명했다는 갑낭, 아니 임금의 옥쇄주머니는 그냥 주머니가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을 꽁꽁 동여맨 옥쇄,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들이 주머니 속에 있었다. 갑낭 속 옥쇄가 바로 그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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