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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할아버지, 거적 자손’ 한탄 언제까지… -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2024년 03월 06일(수) 00:00
#1894년 10월 2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북상하다 12월초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관군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력의 열세로 패배한다. 남으로 후퇴하던 이들은 원평 구미란에서 재집결해 12월 21일 다시 일전을 펼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산 121. 구미마을 뒷산자락에 ‘원평 구미란 전투 동학농민 무덤군’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이때 전사한 무명 농민군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관군 기록에는 37명이 전사했다고 돼 있으나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행히 마을에서 묘역으로 가는 길은 둘레길로 정비돼 있었다. 묘역은 초라했다. 소나무 숲 아래 작은 봉분들이 방치돼 있었고, 곳곳에서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묘역은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농민군들의 이상을 담았던 ‘원평 집강소’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여m 떨어져 있다. 주민들이 40여 년째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장흥 공설 공원묘지’ 4묘역. 1895년 1월 9~10일(음력 12월 14~15일) 장흥 석대들(국가사적 498호) 전투에서 순절한 농민군들이 모셔진 곳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세워진 장흥읍 충열리 일원에 1989년 공설운동장을 만들 때 나온 유해 1699기를 이장했다. 우금치·원평 구미란·태인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한 농민군과 장흥지역 농민군 등 3만여 명은 일본군·관군과 석대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묘역 앞에 세워진 ‘동학군상’과 ‘1894’ 조형물(작품제작 꿈두레 설치미술팀)이 농민군의 원혼을 달래주는 듯하다. 장흥군 관산읍 남송리 도로변에도 무명 농민군들의 묘역이 있다. 석대들 전투 하루 뒤 벌어진 ‘옥산촌 전투’에서 희생된 농민군들이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맞아

1894~1895년 반봉건·반외세의 깃발을 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올해로 130주년을 맞았다. 광주일보 자매지(誌) ‘월간 예향’ 특집으로 동학을 준비하면서 고창과 김제, 장흥 등지에 산재한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관군과 싸워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에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되는 등 많은 전적지·유적지에는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2차 봉기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무명 농민군들이 묻혀있는 묘역을 재정비하는 등 아직도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2월 19일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말목장터에서 ‘고부봉기’ 재현행사가 열렸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봉준·김도삼·정종혁을 중심으로 고부민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을 들었다. 앞서 한 달 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송두호 집에서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며 준비해온 거사였다. 이날 빗속에서 예동마을을 출발해 이평면사무소 앞 말목장터 감나무에 이르는 재현 행렬을 지켜보며 주민들의 선조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명 동학농민군들의 묘소로 전해오는 정읍과 장흥지역을 돌아보며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동학농민군들이 일본군·관군과 전투를 벌인 전적지는 여러 곳이 있지만, 전사한 농민군들을 모신 묘역은 원평 구미란과 장흥 공설 공원묘지, 관산읍 남송리 등지에 불과하다. 1894년 6월 11일 ‘전주 화약’후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10월 8일(음력 9월 10일) 전북 삼례에서 모여 2차 봉기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7월 23일)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전봉준은 심문조서(공초)에서 “다시 기포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는 물음에 이를 명백하게 밝혔다.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 재정비해야

“그 후에 들은즉 귀국(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일언반구의 말도 민간에게 공포함이 없고 또 알리는 글(격서)도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의 서울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지심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1차 묻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2차 봉기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와 달리 수많은 농민군들은 이름을, 묏자리를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흔히 ‘비단 할아버지, 거적 자손’이라 말한다. 멸문지화를 간신히 피한 동학 후손들은 선조에 대한 긍지 하나로 긴긴 세월을 버텨왔다. 무명 동학농민군들의 묘역을 방치하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이다. 행적이 분명한 동학 지도자들은 서훈을 하고, 망실돼가는 묘역은 재정비해 성역화해야 할 것이다. 그때로부터 130년이 흐른 현재, 황토에 배인 무명 동학농민군들의 피울음소리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