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확장된 문해력과 인문학의 재정의 - 김재인 철학자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2023년 11월 21일(화) 00:00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챗GPT를 놓고 ‘하이테크 표절’이라 규정했다. 이런 진단은 향후 논의의 방향을 ‘표절’의 문제로 몰아갔다. 솔직히 말해 챗GPT의 등장을 신기술 환경에서 ‘글쓰기’의 본질이 무엇이고 교육에서 글쓰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논하는 계기로 삼았어야 했다. 또한 ‘읽기와 쓰기’를 중심 활동으로 삼는 인문학의 현재 위상을 살피고 혹 필요하다면 어떻게 재 정의되어야 할지 논했어야 했다.

오늘날 인문학은 두 개의 구별되는 활동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정체성을 잃은 것 같다. 요컨대 우리가 현행 대학 제도에 익숙한 나머지, 그걸 기본값으로 삼으면서 ‘학문 연구’와 ‘교육’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학문 연구는 전문가의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교육은 연구와 별개로 이해할 수 있다. 배우는 쪽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전문가가 되기 전에 꼭 이루어져야 하는 교육이 있다. 모든 미래 세대에게 꼭 필요한 ‘핵심 공통 역량’ 교육이다. 이는 그동안 ‘교양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희석된 전공’ 취급 당해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특히 오늘날에는 정확하지 않다. 요컨대 오늘날 ‘교양 대 전공’의 이분법은 부적합하고 나아가 해롭다.

나는 대안으로 ‘공통 역량과 전문 역량’의 구별을 제안한다. 전문 역량 교육은 연구와 교육이 구별되지 않는 전문 교육 과정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대학원 과정 이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전까지의 교육은 ‘공통 역량’에 집중해야 하며, 인문학은 그런 교육 활동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요컨대 인문학은 ‘학문 연구’ 분류 단위가 아니라 ‘교육’ 단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흔히 언어를 도구 과목이라 부른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도구’라고 한다. 가령, 영어로 쓰인 모든 것을 활용하려면 영어를 익혀야 한다. 도구로서의 언어의 특징이다. 오늘날 누구나 갖춰야 할 핵심 공통 역량은 확장된 언어 능력이다.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주는 전통 인문학은 확장된 언어라는 핵심을 놓쳤지만, 이제 확장된 언어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

과거에 인문학이 담당했던 언어 능력, 즉 문해력(literacy)은 삶과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다. 과거에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같은 자연어가 그런 활동의 핵심에 있었다. 문제는 시대가 변해 자연어가 다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자연어 안에 모든 지식과 기술이 오롯이 담겨 있었지만, 오늘날의 언어는 자연어 외에도 수학, 자연과학, 기술, 예술, 디지털 등으로 확장했다. 따라서 데이터를 읽고 쓰는 능력, 확장된 언어를 다루는 능력, 즉 확장된 문해력이 필요해졌다. 인문학이 한동안 보여온 무력함과 공허함은 인문학의 핵심인 언어를 놓쳤다는 데서 왔다고 진단할 수 있다. 그래서 확장된 인문학이 필요하다.

이렇게 재 정의하고 나면, 사실상 중등교육까지 대부분 교과목이 담당했던 교육이 ‘확장된 인문학 교육’ 혹은 ‘확장된 언어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은 교육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연령에 따라 발달하는 학습 역량이 다르기에, 대학 초년까지는 이런 핵심 공통 역량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이 접근은 인문학을 오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파생 효과도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 후속세대가 더 이상 인문대학 대학원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학문 연구의 대가 끊김으로써 교육 인력도 함께 사라지리라는 전망과 관련된다. 그러나 확장된 인문학은 많은 교수자 수요를 창출하며, 또한 교육과정 운용에서도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인문학에 대한 시민 사회의 인식 개선을 시작으로 연구 지원 확대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