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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물 감야물(加也勿 減也勿) - 김창균 빛고을고등학교 교장
2023년 09월 26일(화) 23:00
이제는 지구 온난화를 지나 지구 열대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올 여름은 긴 장마와 폭염이 기승을 떨쳤다. 그래도 ‘봄은 향기로 오고, 가을은 소리로 온다’고 하였다. 매미, 쓰르라미 울음이 사그라진 자리에 귀뚜라미와 여치 음률이 가득하니, 추석이 코앞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명절은 변모하고 있다. 귀성(歸省) 전쟁으로 대변되던 가족주의적 문화가 퇴색하며, 아무리 없이 살아도 친지 간의 유대와 정을 강조했던 예전과 달리 자신만의 삶을 선호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올해도 정부는 임시 공휴일을 합쳐 6일 연휴를 보장하였지만 충분한 휴식과 내수 경제 활성화에 명목을 두어 전통적 명절의 의미 계승보다는 소비 진작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오죽하면 ‘조상 덕 본 사람은 해외여행 가도, 조상 덕 못 본 사람은 차례 지낸다’는 자조적 말조차 생겨났을까 싶다.

한편으로 개인주의 가치관에 기초한 지구 반대편에서는 ‘Chosen Family’ 개념이 확산하고 있다. 자리 잡은 번역어가 없어 ‘비혈연(비친족) 가족’으로도 일컬으나 ‘선택된 가족’이 일반적인 듯하다. 아직 낯선 용어지만 지난 도쿄 올림픽 폐막식에서 리나 사와야마가 팝의 거장 엘튼 존과 함께 부른 노래가 ‘Chosen Family’였다. 가사를 보면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 거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관계를 맺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고 유전자나 성(姓)을 꼭 공유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물론 이 노래가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지닌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만큼 보수적인 일본에서 이 노래가 불리었다는 것은 가족이 핏줄보다도 공감과 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혈연과 법률혼을 토대로 한 기존 가족 개념을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힘들때 늘 곁에 있어 주는 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사랑해 주는 이도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개념에 ‘선택’을 명시함으로써 이른바 핏줄과 법률혼의 여집합도 인정하여, 정부로부터 돌봄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 혈연이나 인척이 아닌 친구나 이웃을 포함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비등한 사례를 들면, 본래 사람의 반쪽(동반자)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던 반려(伴侶)가 애완(愛玩·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을 대신하고 있다. 애완동물이 반려동물이 되어 당당히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결혼, 부부, 아이, 혈연 등의 요소가 꼭 전제되어야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에이미 블랙스톤(Amy Blackstone)의 말이 떠오른다.

전통의 추석은 봄 여름에 흘린 땀을 거름 삼아 키운 곡식을 조상에게 올려 차례를 지내고, 온 가족이 함께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날이었다. 가족주의로 제한하면 오늘날 추석은 과거와 같은 강한 유대감은 사라진 채 물질적 풍요 속에서 교류 단절에 따른 정서적 빈한을 방조하는 날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을 정서적 안정을 함께 나누는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발전적 계승의 여지가 있다.

‘가야물 감야물(加也勿 減也勿)’이라 했다.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라’는 뜻에는 한가위의 풍성한 나눔과 베풂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어렵던 옛날에도 이날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들에게도 포식의 날”(박경리의 토지)이었으니, 가족에서 나아가 미물에 이르기까지 음식과 마음 나눔을 강조했던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은 서로 나누는 정담 속에서 그간의 응어리도 풀고, 가족의 외연을 확장하여 두루 주위를 살피는 시간이다. 혈연이나 법률혼이 아니어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선택된 가족’과 함께하고 더 어려운 처지에서 정서적 연대를 갈구하는 이를 찾아 화합과 사랑을 도모하는 것이 한가위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