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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덫과 우물 속 진실에 대한 용기-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1년 08월 30일(월) 07:00
요즘처럼 진실과 거짓이 심하게 뒤범벅된 세상을 ‘탈진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어디까지가 맞고 어디서부터 왜곡과 위장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탈진실의 문제는 특히 가짜 정보의 확산 현상에서 심각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특정한 영역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일과 관계에서까지 탈진실의 현상이 당당히 하나의 양식으로 등장하는 시대다. 어떻게 이 지경인가 싶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맹목적이고 주관적인 신념과 이로 인한 감정들을 토대로 화려한 가면놀이와 공허한 언행의 성찬에 익숙해진 결과다. 왜 우리는 사실과 진실, 기만과 호기를 혼동하는가.

우선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먼저 사실이란 단순히 눈앞에 드러난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거나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현상이다. 그리고 항상 분절된 모습들로 떠돌아다니는 특성이 있는 사실들은 항상 일정한 감정을 자극한다. 이미 선입견을 통해서 자리 잡은 호감과 거부감, 불신이나 확신 등이 사실에 내포된 진실의 크기를 좌우하는 결정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불쾌한 대상에 관련된 일은 언제 어떤 모습을 하든, 맥락을 살피기 전에 이미 ‘진실’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바로 확증편향이다. 이런 견고한 선판단의 틀에 집어 넣고 정해진 결론을 내리는 탓에 맥락을 통한 실체적 진실은 가려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개인적이고 맹목적인 특정한 감정에 의한 판단은 굴절된 사실들을 진실의 이름으로 행세하게 한다.

사실들은 조건에 따라서 파편화되어서 여러 형태로 보인다고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진실은 왜곡되거나 모방될 수 없지만,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진실은 사실과 달리 성찰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사실들의 한계 너머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우물 속에 숨어 있다’고.

이런 진실이 사실과 비슷하게 보여서 혼동하기 쉬운 이유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 어느 화창한 날 진실과 거짓은 함께 산책을 하다가 거짓의 제안으로 우물에서 목욕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도중에 거짓이 우물 밖으로 뛰어나가 진실의 옷을 입고 달아나 버린다. 옷을 빼앗긴 진실은 우물 속에 숨어서 지내게 되었고, 거짓은 진실의 옷을 입고 세상을 활개치게 되었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를 캐묻는 것은 맥락을 외면하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객관적 사실 여부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 진실은 더 깊숙한 심연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1886)에 관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쓴 이야기에서도 ‘사실’ 그 너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 유명한 고흐의 낡고 닳은 구두 그림을 1930년 암스테르담의 전시에서 보았다. 그리고 ‘궂은 날도 가리지 않고 한없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는 낡아 빠진 구두’라고 썼다. 한 여성 농부가 신었던 구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한 미술학자가 구두는 여성 농부의 것이 아니고 당시 파리의 거리를 걸었던 고흐 자신의 구두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주장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그림 너머에서 본 것은 고단한 한 여성의 삶과 그럼에도 잃지 않은 강인한 생명력이다. 구두 주인이 누구냐는 것과, 거친 땅 대신 파리의 거리를 걸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과연 그림에 담긴 예술적 진실에 더 다가서는 방법일까.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다. 그래서 사실은 진실로 가는 자료가 될 수 있지만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유일한 방법은 맹목적인 확증이나 사실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내면 즉 우물 속의 진실이 말하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한 마디를 새롭게 새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이자 덕목인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곧 ‘너 자신의 다이몬을 알라’는 의미다. 다이몬은 내면의 소리, 심연에 갇혀 있는 진실의 소리를 말한다. 이 우물 속 진실로 가는 길은 의지와 용기뿐이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