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기 체육부장] ‘스포츠 우먼’과 ‘스포츠 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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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기 체육부장] ‘스포츠 우먼’과 ‘스포츠 맘’ 사이에서
2021년 08월 18일(수) 01:45
“어머니 혹은 아내로 자신을 한정하지 말라. 스포츠에서도 출산한 여성이 한계를 극복하고,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다.” 자메이카 여성 육상선수 프레이저 프라이스(35)는 2017년 아들을 출산했다. 그리고 이듬해 트랙에 복귀한 뒤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뛰었다. 이후 2019년 도하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100m에서 10초71을 찍고 우승을 차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는 100m 2위, 200m 4위, 400m계주 우승을 차지했다. ‘여성은 출산하면 선수 생명이 끝난다’는 편견을 깬 위대한 도전이었다.

최근 도쿄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합작한 광주 서구청 펜싱팀 강영미(36) 선수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운동선수로서 당연한 목표겠거니 생각하고 물었다. “3년 뒤 파리올림픽에 출전할 거죠?” 잠시 머뭇거린 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내년 아시안 게임까지는 남편과 얘기하고 있는데…. 파리까지 간다고 신문에 나면 남편이 무척 당황할 것 같습니다.”

강영미는 지난 2015년 결혼했지만 출산을 미루고 있다. 그는 “솔직히 지금도 아이 낳고 선수 생활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출산 후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나를 기다려 주는 팀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한다면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펑펑 울지도 모른다.

녹록지 않은 ‘결혼과 선수 생활 병행’

남녀 선수를 불문하고 국가대표로 뛰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내야 한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규정 대회에서 성적을 올리고 랭킹 포인트를 쌓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여성 선수들은 임신과 회복 기간 동안엔 아예 출전 기회마저 없다. 출산 후 육아는 차치하더라도 가장 큰 난관은 컨디션 회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 난 몸이 성할 리 없기 때문이다. 결혼한 대한민국 여자 선수들의 공통 고민이 여기에 있다.

‘허들 여제’ 정혜림(34)도 예외가 아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2011년 결혼했지만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복귀하는 시기가 애매해지다 보니 아예 출산을 미루게 됐다고 한다. 그는 지난 7월 2021 고성 전국실업육상경기대회 여자일반부 100m 허들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올해만 모두 네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그를 이길 선수는 없다.

그가 이처럼 경기력에 물이 오른 전성기임에도 과감히 모든 걸 포기하고 출산을 감행할 수 있을까. 여자 선수에게 출산은 삶과 꿈을 포기해야 하는 나락일 수 있다. 중앙일보 박소영 기자는 “아이를 갖는 순간 20~30년간 쌓은 경력은 단번에 ‘회복 불능’ 상태가 된다. 임신·출산·육아는 라이벌보다 더 무서운 적”(나라경제 330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정혜림에게 남편인 김도균(42) 육상 국가 대표팀 코치마저도 쉽게 출산을 권유할 수는 없다. 김 코치는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4위에 오른 우상혁의 스승이기도 하다.

임신·출산은 라이벌보다 무서운 적

여자 스포츠인들은 다양한 편견에 포위돼 있다. 대표적인 게 출산과 관련한 것들이다. 기혼 남자선수들에게는 ‘결혼하고 아이 낳은 뒤 플레이가 더 안정적이고 좋아졌다’고 종종 말한다. 하지만 기혼 여자 선수들에게 “애 낳고 실력이 눈에 띄게 늘고 플레이가 더 좋아졌다”고 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궁(神弓)으로 불렸던 광주시청 기보배는 2018년 출산 후 활터에 복귀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다.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그는 지난 6월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열린 제38회 올림픽제패 기념 회장기 대학·실업 양궁대회 여자 일반부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그럼에도 여전한 세간의 평가는 ‘출산후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로 압축된다.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여자 운동선수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기혼 남자 선수들에 견주면 한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운동을 자신이 선택했으니 출산 후 경기력을 회복하는 것 또한 모두 선수의 책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제 스포츠 우먼과 스포츠 맘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 선수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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