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의 정치학 - 홍행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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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부의 정치학 - 홍행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2021년 07월 14일(수) 02:00
여야 정치권이 ‘터부’(taboo: 금기) 논란으로 시끄럽다. 7개월 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라는 메가 이벤트를 기화로, 평소라면 언감생심 꺼내지도 못했을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낙연 전 대표의 ‘이명박·박근혜 사면’ 발언에 이어 최근엔 송영길 대표의 ‘대깨문’ 발언이 당의 내홍까지 불러일으켰다. 제1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이준석 대표가 ‘박근혜 탄핵 찬성’ 발언으로 홍역을 치렀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하지만, 다양한 사회집단 가운데서도 특히 정치권에선 터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문화인류학자 하르트무트 크라프트가 쓴 ‘터부, 사람이 해서는 안 될 거의 모든 것’에 따르면, 터부는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개인이 삼가야 할 규칙이다. 특정 집단의 의식적·무의식적 질서를 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터부를 통해 구성원들은 정체성을 확립하고 확인한다.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집단의 정체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권에서 터부가 중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기 깨뜨려야 집단의 발전 가능

정치권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존 터부가 소멸되고 새로운 터부가 만들어진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선 ‘군부독재’나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단어는 정권 내부에서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터부로 통했다. 또 촛불혁명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당 내 실세인 ‘친문’을 비하하는 단어들이나 ‘전직 대통령 사면’과 같은 용어가 금기로 꼽혀 왔다.

이는 야당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의힘에서는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고 분열을 촉발한 ‘탄핵’이나 ‘태극기 부대’같은 단어가 금기시되어 왔다. 만약 터부시된 이들 단어를 사용하는 내부 구성원이 있다면 그들은 소속 집단 구성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제명될’ 위험에 직면했다. 그들이 사용한 금기시된 단어들이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영길 대표는 지난 5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소위 ‘대깨문’이 ‘누가 되면 차라리 야당을 (찍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순간, 문 대통령을 지킬 수도 없고 제대로 성공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된다”고 말했다가 큰 논란이 됐다. ‘친문 세력이 당내 유력 후보인 이재명 경기 지사를 견제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는데, ‘대깨문’은 문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사용해선 안 되는’ 일종의 금기어였는데 송 대표가 이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당연히 친문 강성 지지층의 비난을 초래했다.

이준석 대표도 지난 6월 3일, 대구 합동연설회에서 “국가가 통치 불능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그 시점에 정당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제1야당의 터부인 ‘탄핵 찬성’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끄집어 낸 이 대표도 당내 친박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다. 집단의 금기를 공개적으로 침범하고 깨뜨린 이들 집권여당과 제1야당의 대표는 그러나 비판은 받고 있을지언정, 아직까지 ‘제명’될 위험에까지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탈환’에 대한 간절함이 지도자의 ‘금기 깨기’를 전략적 차원에서 묵인 또는 용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정체성 확립에는 도움이 되지만

하지만 기존의 금기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당장 대다수 민주당 대선후보들이 ‘노무현 정신 계승’을 외치는 등 선거 캠페인에서 노 전 대통령을 앞세우는 것이나, ‘정통 보수’를 자임해 온 국민의힘이 30대 원외인사를 당 대표로 선출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하르트무트 크라프트는 “터부에 굴복하거나 터부를 침범하고 폐지하는 것, 그리고 터부가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항상 변화 속에 있는 과정”이라면서 “터부는 개인과 단체에 자신감을 안겨 주고 정체성을 확립시켜 준다. 그러나 터부를 깨뜨리는 것은 집단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대선은 이미 획득한 정권을 지키려는 진보와, 빼앗긴 정권을 되찾으려는 보수가 천길 낭떠러지 위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싸우는 건곤일척의 승부다. 그만큼 양 진영의 결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선거이기도 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폭발적으로 용솟음치는 사회적 에너지가, 이미 시효가 다 된 터부를 정리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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