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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육유, 시 1만수 남긴 남송의 대표 우국시인

2020년 09월 15일(화) 00:00
<초당대총장>
육유(陸遊, 1125~1210)의 자는 무관(務觀)이고 호는 방옹(放翁)으로 현재의 절강성 소흥시에 해당하는 월주 산음현 출신이다. 남송의 대표 시인 중 한 명으로 우국시인(憂國詩人)으로 오래 존숭되었다.

부친은 육재로 군사관련 일을 맡은 관리였는데 평소 문학에 관심이 큰 장서가이기도 하였다. 부친이 관명에 따라 남방의 물자를 개봉으로 운반하는 도중 회하의 배안에서 태어났다. 유아 시절 금나라가 개봉을 유린해 휘종과 흠종이 북으로 끌려가고 북송 왕조가 무너지는 정강지변이 발생했다. 부득이 일가와 함께 강남으로 피난했다.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이 시문에 재주를 발휘했다. 20세때 당완과 결혼해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모친이 집안 친척인 며느리를 싫어해 부득이 이혼하고 왕씨와 재혼했다. 1153년 진사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재상 진회의 손자가 차석이 되자 진회는 이를 시기해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육유를 낙제시켰다.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해 시작에 몰두했다. 34세에 지방 관리가 되어 여러 지방에서 근무했다. 융흥 통판으로 재직 중 장준의 주전론을 지지해 해임되었다. 죽은 장준의 명예를 꾀했으나 금과 남송과의 화평을 비난하는 꼴이 되어 부득이 관직을 떠나게 된 것이다. 4년후 46세에 기주 통판으로 다시 임명될 때까지 고향에서 낭인 생활을 했는데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속에서 힘든 관직생활을 했다.

1189년 남송 효종이 태자 조돈에게 양위하니 광종이다. 화평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전파의 일원인 그는 실직하게 되었다. 예부낭중의 직위에서 탄핵되었다. 관직을 떠나 귀향해 자기 집을 풍월헌(風月軒)이라 짓고 말년에 창작에 전념했다. 죽을 때까지 1만수에 달하는 작품을 남겨 중국 시사상 최다작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진사시험에 실패하고 낙향해 고향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야유회에 나온 첫부인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은 재혼한 남편에게 청해 육유에게 술과 음식을 보냈다. 이에 감격해 쓴 시가 유명한 채두봉(釵頭鳳)이다. 아래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산같은 맹세 아직 남았지만 글로써 전하려니 다할 길 없구나. 말아야지. 말아야지. 말아야지”(山盟雖在 錦書難託 莫, 莫, 莫). 75세가 되는 1199년 육유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당완을 여전히 그리워했다. “혼 끊기고 향기마저 사라진지 어언 40년...”으로 시작되는 오언절구를 남겼다. 그녀에 대한 육유의 사랑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육유의 대표 작품은 역시 우국우민을 노래하는 시에서 많이 발견된다. 북송 멸망 후 고향을 떠나 타지인 남쪽에서 살아야 했던 많은 이주민의 애환을 노래했다. 금수만도 못한 금나라를 이겨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시 곳곳에 스며있다. 이러한 염원을 담은 대표시의 하나가 사지춘(謝池春)이다. “진관의 북녘 땅은 그 어디냐. 지나간 세월 탄식하노나니 또 헛되어 지나갔네.” 시대를 아파하고 나라의 명운을 걱정하는 우국시인의 충정과 한이 처절하게 표출된다. 1177년 지은 관산월(關山月)이라는 시도 중원 회복의 바람을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중원에 예로부터 전쟁은 많아서 반역의 귀족들 자손을 못 남겼는데 유민들 죽음을 무릎쓰고 회복을 원하는가”

말년에는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져 집안에서 애용한 술잔까지 팔아야 할 처지였다. 권신 한탁주의 천거로 1202년 출사했다. 효종, 광종 실록 편찬의 일이었다. 그러나 1년만에 다시 귀향해 1209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한평생 곧게 살아온 그의 삶에서 말년 한탁주와의 인연은 큰 오점을 남겼다. 한탁주는 권력 강화를 위해 주희 등 유학자를 숙청한 경원위학지금(慶元僞學之禁)을 일으킨 간신이었다. 송사 간신전에 포함될 정도로 문제의 인물이었는데 말년에 사는 것이 궁핍해지자 어쩔 수 없는 출사였다.

마지막 시는 ‘아들에게’라는 제목의 칠언절구로 중원을 수복하게 되면 제사를 모시고 그 사실을 아비에게 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남송 최고의 우국시인다운 절명시(絶命詩)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