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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한의 분묘제사
효에 바탕을 둔 분묘제사 통해 공동체 의식 다져
2020년 08월 19일(수) 00:00
나주 복암리 1호분 석실 토기 출토 상황 <석실 폐쇄 전에 이루어진 제사 흔적, 전남대학교박물관 발굴>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지금까지 4차에 걸쳐 마한의 무덤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무덤이 다른 자료에 비해 보수성이 강하고 보존이 잘 된 편이어서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잘 남아있는 마한의 무덤을 보면 특별한 현상이 확인된다. 무덤 외부에 폐기된 유물들이 매우 많은 것이다. 도굴되지 않은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는 내부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무덤 외부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크게 다르다. 이와 같은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석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종묘제사와 분묘제사

제사의례는 자연 현상에 대한 경외감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조상의 영혼을 위해 정성을 바치는 행위로 변화되어 나갔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조상이 남겨준 경작지를 중심으로 혈연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사람의 영혼을 혼(魂)과 백(魄)으로 구분하면서 혼을 중시하였던 고대 중국에서는 거주지에 마련된 사당(廟)에서 혼을 위한 제사만 이루어졌다. 은허에서 발굴된 상나라 복골에서 종묘제사에 대한 기록만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혼과 백은 각자의 장소로 분리되어 서로 통함이 없다고 하였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교감은 하늘에 올라 신이 된 조령(祖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장소는 사당으로 한정되었다.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조령제사를 실시하면 현세의 왕과 그 종족집단에게 조상신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분묘제사가 시작된 것은 전국시대이며 죽은 조상의 혼이 무덤으로 돌아온다는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지역 제후들의 발호 속에서 거대한 무덤들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진시황릉은 주변에 분묘제사를 위한 대규모의 능침시설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 주구 유물출토 상황
◇분묘제사의 발전

분묘제사는 사유재산과 가족공동체가 중시되면서 발전해 나갔다. 한나라 때는 일반 귀족들도 무덤에 비석과 사당을 세우고 분묘제사를 지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사당(廟)과 무덤(墓)의 이원적 구조가 무너지고 분묘제사가 종묘제사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는 획기적 변혁으로서 윤리·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를 바탕으로 한 유교의 성행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효에 바탕을 둔 한나라의 분묘제사는 후한 명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매년 초하루에 황족과 중신들이 조정에 모여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행사를 원회의(元會儀)라 불렀는데 광무제를 이은 명제는 첫 원회의를 선왕의 원릉(原陵)에서 개최하였다.

그 명분은 광무제에게 예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회의를 조정에서 열면 중신들이 자신을 무시하여 불참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

고대 일본에서도 무덤에 선왕을 안치한 다음 무덤 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왕위 계승의식을 거행하기도 할 정도로 분묘제사는 중요한 행사였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구 출토 말뼈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발굴>
◇마한의 분묘제사

마한의 제사와 관련된 내용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중략), 10월에 추수를 끝내고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國邑)에서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 제사를 주재하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이는 농경과 관련된 제천의식 위주이며 분묘제사와는 무관하다.

마한의 분묘제사는 무덤을 통해 알 수 있다. 석실묘 입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석실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행하였던 매장의례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분구 평탄면이나 주변 도랑에서 출토되는 많은 토기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 토기들은 분묘제사에서 음식물을 공헌하고 남겨졌던 것이다. 출토상황을 보면 여러층을 이루고 있어 주기적으로 분묘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마한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번데기 껍질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마한의 수릉

수릉은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자신의 무덤이다. 진시황은 13살에 등극한 직후부터 자신의 무덤인 여산릉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거대한 무덤일수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 두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에서는 가족묘인 분구묘가 성행하였으므로 두 번째 매장자부터는 수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첫 주인공을 위한 수릉도 확인된 바 있다. 무안 고절리 고분이 그것이다.

이 고분은 서기 500년 전후에 축조된 길이 38m, 높이 5m 규모의 방형 고분인데 옹관이나 석실 등 매장시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무덤이 축조되어 있었음에도 묻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주인공은 530년경 백제에 복속된 뒤에 사망함에 따라 이 큰 무덤에는 묻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523년에 붕어하여 525년에 안장되었던 백제 무령왕의 무덤 직경이 22m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의 경우처럼 사망후 바로 무덤에 묻히지 않고 일정 기간 거치는 것을 빈장(殯葬)이라 하는데 이는 마한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 석실은 3차례 매장이 이루어졌는데 제3차의 주인공은 40대 여성으로 밝혀졌다.

이 여성은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다량의 검정파리 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었다. 검정파리는 가을에 활동이 왕성하며 알에서 번데기로 변하는데 6일 정도가 필요하다. 이 여성은 가을에 사망한 후 최소 6일간 빈장을 치루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이에 대한 인식과 의례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다. 현대 사회에서는 화장이 일반화되고 거주지에서 주기적으로 행해지던 개별 제사가 축소되면서 흔히 시제(時祭) 혹은 묘사(墓祀)라 부르는 분묘제사가 커지는 것 같다.

거주지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나 차례는 정해진 날에 모시다보니 멀리 있는 친척들이 모이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모이기 쉬운 날을 선택하여 분묘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집안마다 사정이 다르고 인식이나 방식도 다르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은 그 이전의 전통에서 변화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전통이라 따르고 있는 것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 나갈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