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정치의 언어 - 윤영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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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치의 언어 - 윤영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2025년 09월 17일(수) 00:00
고 노회찬 의원은 구태정치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삼겹살 불판론’를 제기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거대 양당이 분할하던 정치적 토양을 빗대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진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다”라고 일갈했다. 서민의 삶에서 건져 올린 직관적 표현이었기에 널리 회자됐다. 대중이 민주노동당 정치인 노회찬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로 평가 받는다.

김대중 정권 내내 ‘소(小)통령’으로 불렀던 박지원 의원은 대북송금 사건으로 영장실질 심사에 들어가기 전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는 시구를 인용했다.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로 자신의 처지와 권력무상을 절묘하게 압축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고 유언했다. 전 대통령이자 한 인간으로서 운명과 맞딱뜨려던 그의 삶은 시대의 아픔으로 국민 가슴에 남았다. 단문이 장광설보다 큰 감동을 준다는 문장의 미학도 일깨웠다.



혐오와 막말로 가득찬 정치공간

정치판에 혐오와 적개심을 품은 언어가 넘쳐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며 야당과 겉치레 인사조차 거부했다. 내란에 동조하고 옹호한 야당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였으나, ‘야당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만 선명하게 부각됐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나가도 너무 나갔다. 정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 중에 “노상원 수첩이 현실로 성공했더라면 이재명 대통령도, 저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하자, “제발 그리됐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되받았다. 역대급 망언이자 저주다.

문제의 수첩에는 12·3 비상계엄을 사전 기획한 노 전 정보사령관이 작성한 메모가 담겨 있다. 정치인, 언론인, 노조, 판사 등을 ‘수거 대상’으로 적시한 내용이다. 나치가 유태인 학살에 동원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수거’는 당연히 ‘처리’ 과정을 암시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은 수거를 ‘버리거나 내놓은 물건 따위를 거두어 감’이라고 설명한다. ‘처리’는 정청래 대표가 떠올리는 학살이다.

학계에서는 극단의 언어에 둔감한 우리사회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김왕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분석이다. “혐오 감정은 비하나 모멸감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유해인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긴장, 그리고 그것들을 소멸하는 적대감을 포함한다. 독일 나치즘이 유대인을 단순히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유해 해충으로 묘사하고 그들을 박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한 후 가스실에서 대량 ‘청소’를 진행하였듯 혐오는 생명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상대 진영을 공존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살벌한 우리 정치문화에 대한 경고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벼랑 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적 차이를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으로 이해하고 그 차이를 좁히려는 타협과 관용의 정치가 이뤄질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1987년 민주화 과정이나 그 이후의 민주적 공고화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민주주의 본령은 대화와 타협

험악한 여야 대치 정국에도 한 줄기 희망은 있어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기꺼이 만났다. 윤 전 대통령이 야당 대표이던 이재명 대통령의 수차례 요청에도 만남을 거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대통령은 장 대표의 말에 대해 “공감가는 게 꽤 많다”고 언급했다. 이 대통령이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용인이자 포용이다. 정치권에서 대통령의 역할과 여야 당의 책무가 다르다고 선을 그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원칙과 룰은 공유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단 한 차례도 대화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 했다. 그가 남긴 정치 10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이다.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키되 방법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확고하게 지켜야할 원칙이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흥정이나 양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원칙이 정해진 다음에는 모든 것을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가며, 양보도 하고 타협도 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

말로만 민주주의와 정치를 외치는 ‘가짜’ 정치인들이 되새겨야할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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