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비포 선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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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비포 선라이즈
<16>영화 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 일치하는 18년 대서사시
로맨스 영화 바이블…28년만에 ‘비포 시리즈’ 순차 재개봉
2024년 08월 08일(목) 21:00
“내가 눈을 돌릴 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좋아”...영화 속 명대사.
기차에서 만난 청춘남녀가 첫 눈에 끌려 합석한다. ‘킨스키’를 읽는 남자와 ‘바타유’를 꺼내는 여자,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 같은 남녀. 둘은 달리는 기차에서 인생에 대해 논한다.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줄리 델피)은 서로 다름에도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음을 느낀다. 남자는 “초면에 미친 소리 같지만 이번 역에서 같이 내리자”는 제안을 건네고 강렬한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은 비엔나역에서 하차한다.

킨스키에 따르면 이 같은 행위는 사랑의 일탈이며, 바타유적 시각으로 금기 위반인 셈. 이들 운명의 종착지는 어떤 모습일까.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본다. 세계적인 로맨스 바이블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지난달 17일 전국 멀티플렉스, 광주독립영화관 등에서 28년만에 재개봉해 시네필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성하의 계절, 청춘 남녀가 낯선 여행지 곳곳을 누비는 낭만적인 내용은 로맨티시즘의 극치를 선사한다. 총 3부작인 ‘비포 시리즈’는 향후 차례로 전국 극장가에서 릴레이 재개봉할 예정이다.

수년에 걸친 사랑의 생몰연대는 일출로 은유된 ‘비포 선라이즈’에서 시작해 10년 후 사랑의 잔향을 느끼는 ‘비포 선셋’의 일몰, 식어가는 한 밤중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진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들은 도시 곳곳을 누비다가 헤어질 준비를 한다. 두 사람이 작별한 엔딩 이후 영화는 이 공간 등을 비추는데, 메인 시퀀스와 달리 공간은 쓸쓸하게 느껴진다.


사랑의 탄생을 그린 트릴로지 첫 작품 ‘선 라이즈’는 시리즈 가운데 작품성에서 필두에 있다. 명장면 중에서도 으뜸 가는 대목은 앞서 언급한 기차 씬 외에도 레코드샵 ‘ALT&NEU’ 청음실 장면이다.

제시와 셀린은 한 뼘 거리 음악 감상실에 들어가 캐스 블룸의 ‘Come here’을 함께 듣는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일까. 청음(聽音)의 순간 남자는 몰래 여자의 뺨을 바라보고, 내리깔았던 시선은 은밀히 그의 입술로 향한다. 사랑의 탄생이 목도되는 순간, 둘은 어떤 대화나 스킨십 없이도 ‘하나’가 된다.

실제로 이 공간은 ‘알트운트노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흐르는 공간은 유독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한다는 후문이다.

비엔나행 열차에 몸을 실은 제시(에단 호크 분)는 기차에서 우연히 셀린(줄리 델피)를 만나 합석한다. 평범한 대화지만 이들은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당신이나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사이 비좁은 공간에 있을 거야”

작품의 묘미는 대사가 주는 울림에 있다. 언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랑의 매개라는 듯 다채로운 스크립트가 비엔나 도시 곳곳에 쏟아진다.

명대사들을 하나씩 미분하면서 뜻을 음미할 수도 있지만, 해석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고 ‘첫사랑’의 감정 그 자체를 탐미하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다. 그런 점에서 길거리 시인이 ‘밀크셰이크’라는 단어로 쓴 즉석 시가 졸작이라거나, 두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서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않은 것이 ‘기대를 배반했다’라고 평하는 것은 속단이다.

많은 고전들은 이미지, 상징 등으로 감독의 의도를 암시한다.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몸짓을 보여주면 무슨 의미인지 맞추는 게임(셔레이드)처럼 상상하는 재미를 주지만, 본래 뜻이 왜곡되는 측면도 있다.

‘비포 선라이즈’는 셔레이드 없이도 사랑의 만화경을 분명히 펼쳐 보인다. 1시간 40분 내내 무수한 대사를 나열하며 한 존재가 다른 이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적실히 포착한다.

그러면서 수려한 미장센도 놓치지 않는데 엔딩 크레딧 직전 만큼은 이들이 누볐던 도시의 텅 빈 모습을 보여준다. 그 어느 낭만적인 도시라도 사랑과 사람 없이는 황량한 비둘기 공터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조르주 바타유는 금기 위반을 염려하면서도 ‘모든 금기는 위반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1년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
끝내 둘은 일 년 후 재회를 약속한 채 기차역에서 이별한다. 이 장면이 특히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라는 디제시스(diegesis·허구적 세계)에서 펼쳐지는 발화들은 다큐가 아닌 이상 실제의 말하기와 구분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18년에 걸쳐 ‘작중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일치시켜 허구성을 희석한다. 영화적 경험을 논-디제시스(현실적)의 감각으로 연결시키는 이 방식은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제시와 셀린의 만남, 이별, 기다림이 관객들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물론 이러한 파토스는 3부작의 서사를 인지한 상태여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비포 선라이즈’는 재개봉작인 덕에 관객 대부분은 그 흐름을 이미 알고 있다. 스크린에 다시 오르는 비포 시리즈만이 줄 수 있는 매력 아닐까.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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