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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한 부 - 김대성 제2사회부장
2024년 04월 17일(수) 21:30
‘이 가증스러운 주검을 보라!’ 부산일보가 1960년 4월 12일 자로 보도했던 고(故) 김주열 열사 주검 사진의 제목이다. 사진 아래에는 “1960년 3월 15일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가 같은 해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돼 경찰의 잔인함이 세상에 폭로됐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1960년 3·15 마산의거에 참여했다가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모습은 당시 부산일보 마산 주재 허종 기자가 최초로 촬영해 다음 날인 12일 특종 보도했다. 지금 보아도 섬뜩한 면이 있는 이 보도는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촉발해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자 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 호외에 담긴 기자들의 공동 사표 내용이다.

당시 광주에서 발행된 일간신문은 광주일보의 전신인 옛 전남일보와 옛 전남매일 두 개로, 두 신문 모두 18일 오전 전남대 앞 상황과 오후 도심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에 대해 19일 자에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계엄군이 언론검열관실을 통해 5·18과 관련한 보도 일체를 불허했기 때문인데 기자들은 ‘죽을 각오’로 호외를 내고 진실을 알리려 한 것이다. 당시 기자들의 공동 사표가 담긴 호외가 뿌려진 뒤 5월 21일부터 10일 동안 두 신문의 발행이 중단되면서 호남 언론의 기능은 전면 마비됐다.

위의 두 사례는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기사가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예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역 신문이라는 한계를 넘어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4·19 혁명 기념일과 4월 20일 광주일보 창간 72돌을 앞두고 기자가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신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귀들이다.

/big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