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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로와 금남로 -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2023년 11월 20일(월) 00:00
광주의 옛이름은 무진주(武珍州)였다. 광주의 진산(鎭山)은 무등산, 무등산은 본디 서석산(瑞石山)으로 광주에는 서석동, 서석 초등학교 등 온갖 명칭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서석’이다. 광주에는 수 많은 도로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거리는 바로 충장로와 금남로이다. 근래에는 지역의 주소를 도로명으로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광주에는 제봉로(고경명)·죽봉로(김태원) 등 광주지역 출신으로 혁혁한 학문적 업적과 의혼을 드날린 명인들의 호를 딴 많은 거리가 명칭을 얻었지만 그래도 대표적인 도로는 역시 충장로와 금남로이다.

충장로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은 무등산의 장군 김덕령(1567-1596)의 무공(武功)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금남로는 금남군(錦南君)이라는 군봉을 받은 정충신 장군의 공적을 현양하기 위해서 호칭하는 이름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몸을 바쳤건만 억울한 모함과 참소로 옥사한 김덕령을 추모하는 거리이다. 인조 때 이괄 난을 평정하고 정묘호란에 큰 무공을 세운 정충신은 시호는 충무(忠武)이지만 시호보다는 군봉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지어, 이제는 광주의 금남로만이 아니라 5·18의 상징적 거리이자 민주항쟁의 국가적 거리로 널리 알려진 곳이 되었다. 두 거리는 바로 의혼과 의기가 살아 숨쉬는 거리로 국난에 몸을 바쳐 나라를 건져내는 호남정신을 잊을 수 없게 해주는 거리임이 분명하다.

충장로는 세월이 가면서 옛날의 충장로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시청과 도청이 딴 곳으로 옮겨가면서, 거리가 한산해지고 상권이 약해져 예전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김덕령 장군의 그 뛰어난 용맹과 기개로 왜적을 퇴치하던 충혼을 기리기에는 기개가 약해지는 거리로 변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1950년대 말 내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호남의 중심적 상가이자 삶의 화려한 모습의 거리였건만 어찌하여 세월은 이 멋진 거리를 이렇게 스산한 거리로 만들었단 말인가. 당국은 호남의 의혼과 의기를 더 북돋는 의미에서라도 도심을 활성화하는 정책에 무엇인가의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기대해본다.

금남로의 명칭을 선사한 금남군 정충신장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은 광주를 지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이 정충신이라고 했다. “…신분이야 구종직처럼 미천했으니 / 재주는 이순신과 견주었네 / …웅장한 무등의 진산에서 / 기특한 사나이 태어났네” 광주하면 떠오르는 정충신, 다산은 그를 흠모해서 천추에 빛나는 시를 읊었다. 신분과 계급이 인간을 평가하는 그런 세상에서, 참으로 미천한 신분의 정충신은 뛰어난 지략과 충성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일한 보람으로 1등 공신에 오르고 높은 벼슬을 지내며 군봉과 시호까지 받았으니, 인간의 능력으로 인물을 평가하던 다산은 그를 추앙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절, 일본은 물러가라고 외치던 의로운 학생들의 함성이 서려 있는 금남로, 4·19의 반독재 항거 때 대통령은 물러가라고 외치던 학생들의 함성, 6·3 한일협정반대운동과 6·10 항쟁 때 학생들이 가득 메워 외치던 함성, 5·18 민중항쟁의 피가 흐르고 시신이 즐비하던 금남로, 금남로 정신은 바로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던 뜨거운 저항정신으로 승화된 곳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산의 이야기를 되새겨야 한다. 신분이야 낮았지만 재주는 이순신과 견주었기에 시호도 이순신과 똑같은 충무공인데, 온 나라에서 이순신만이 충무공이고 정충신이 충무공임을 아는 사람이 적으니 이 일을 또 어쩌란 말인가. 진무공신 1등으로 금남군의 군봉까지 받은 혁혁한 장군이요 애국자 정충신, 우리가 낯익은 이순신의 충무공만큼 정충신의 충무공 또한 온 세상에서 기억해주는 수준에 이르도록 해야한다. 바로 우리 광주시민들이 해내야할 오늘의 과제이다.

정충신은 무인이었으나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제자로 경사(經史)에 밝은 문인으로도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호가 만운(晩雲)이어서 지금도 그의 문집인 ‘만운집’이 전해지고 있는데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듯이 훌륭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무공에 대한 찬양과 함께 그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를 현양하여 금남로와 함께 충무공이 정충신임을 더 크게 알려지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