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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죽음으로 막아낸 북한군 8월 공세…낙동강 방어선 구축
낙동강 뚫리면 대구·부산 점령되는 건 시간문제
국군 수도사단, 북한군 1245명 사살·장비 노획
북한 유격연대, 포항시내 진입으로 위기 맞기도
2023년 03월 12일(일) 19:25
1950년 8월 3일 당시 폭파된 왜관철교 모습.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에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퇴하려 해도 내어줄 땅이 남아있지 않았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대구와 최후 거점인 부산은 지켜내야 했다. 유엔군 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서 피아는 ‘죽느냐, 사느냐’의 각오로 부딪쳤다.

6·25전쟁 때 북한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됐던 왜관철교(맨앞쪽). 상단 트러가 없는 부분이 폭파됐던 부분이다. 낙동강은 동족상잔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매일신문 김영진 기자
◇왜관철교 폭파와 잔학한 미군 학살

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 내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오후 8시 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북한군은 9일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에 들이닥쳤다. 새벽에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

왜관읍 303고지에서는 15일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남아 북한군의 야만성과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을 알렸다. 16일 미 B-29 폭격기 98대는 낙동강 서쪽 강변에 960t의 융단폭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폭격이었다.

<6> 낙동강 방어선 전투(上)
◇국군 최대 전과 올린 안강·기계 전투

4일을 전후해 길안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습격을 받고 의성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구간의 간격이 발생했다.

국군의 취약점을 간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은 국군이 배치되지 않은 산악 지역을 통과해 7일 오후 도평동(기계 북방 40km)을 점령하고 8일에는 죽장(기계 북방 20km)에 도달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목표가 기계-안강-경주 축선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대응방책을 찾지 못했고, 그 사이 북한군 제12사단은 10일 기계까지 거침없이 진출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위기였다. 10일부로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그러나 가용할 병력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편성중인 제25연대를 안강 지역에 투입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의성에 있던 수도사단에 이동명령이 하달됐다. 수도사단 제1연대로 안강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차단하고, 제18연대로 기계에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안강-기계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기로 했다. 실로 대담한 결심이었다. 수도사단의 안강 도착이 빠르냐, 북한군의 경주 또는 포항 진출이 빠르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전환됐다. 기계에 진출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이 후속부대의 진출 지연과 보급부진으로 멈춰선 것이다. 18일 기계 일대에서 총공격이 시작됐고 끈질기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후방이 차단되자 철수하기에 급급했다. 북한군은 많은 전사자를 남겨둔 채 일부 패잔병만이 비학산 일대로 도주했다. 동해안 지역 최대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됐다.

수도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천24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획득했다.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반전의 연속 포항지역 전투

2일 영덕에서 철수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청송-기계 축선의 제12사단과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영덕을 방어 중인 국군 제3사단 제22, 23연대는 치열한 근접전투를 반복했지만 제23연대 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저하된 국군 제3사단은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영덕 남쪽 강구를 거쳐 10일에는 강구 남쪽 장사동으로 철수했다. 11일에는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포항 시내까지 진입해 국군과 유엔군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포항의 위기 상황을 보고 받은 제8군사령관은 연일비행장 확보를 위해 미 제19연대 제3대대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포항에서 연일비행장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했다. 포항 북방에서는 북한군 제5사단 일부가 동해까지 진출해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포위됐다가 17일 오전 6시쯤 유엔 해군 함정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구룡포로 철수했다.

포항 탈환 임무를 받은 민기식부대(민부대)는 18일 새벽 포항 시내로 진입해 북한군 180명을 포로로 잡고 포항을 탈환했다. 이후 동해안 지역 전선은 9월까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다부동 전투가 펼쳐졌던 어느 고지의 처참한 모습.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시산혈하의 다부동 전투

8월 초 낙동강 방어선 대구 방향에는 북한군 5개 사단이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북한군 제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5일부터 8일간에 걸쳐 낙동강을 도하한 후에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 공격에 안간힘을 다했다.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핵심 지역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지역 조정에 따라 13일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됐다. 국군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 북한군 일부가 한발 앞서 328고지와 유학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제1사단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또 18일 새벽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날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국군 제1사단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미군과 협동으로 적진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한·미 간 최초 협동작전이었다. 미군이 국군의 전투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관례에 비춰 파격적인 조치였다.

북한군도 18일 전차를 새로 보충 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되었다. 이때 국군 제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손실이 발생해 병력이 감소하게 되자,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이로 인해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전우 죽어가는 모습에 총신이 달아오르도록 쏘고 수류탄 던졌다”

다부동전투 참전 이동철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

“조금 전까지 이야기 나누던 전우가 북한군 총탄에 시뻘건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 머리가 확 돌았어요. 그때부터 무서운 게 없더군요. 총신이 달아오르도록 M1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요.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면서 전우의 주검을 수습할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전투 수암산 고지전에 참전했던 이동철(91·사진)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게 치열했던 전투 현장과 눈앞에서 산화해간 전우에 대한 기억은 어제처럼 또렷하다.

이 지부장은 1950년 8월 중순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 5중대 이등병으로 다부동 전선에 투입됐다. 훈련은 첫날 부대편성과 응급처치, 둘째와 셋째날 소총 분해결합, 실탄 8발 사격이 고작이었다. 1사단에 전입한 그는 다음날 해질녘 수암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1950년 8월 16일 왜관읍 북쪽 낙동강 서쪽에 융단폭격을 했다.
그는 “수암산 고지를 차지하려고 돌격하는데 박격포와 수류탄이 비처럼 쏟아졌어요. 북한군 박격포는 정말 지독했고, 그때 전우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면서, “이후 영천 신령전투 현장으로 이동했고, 이후 수색병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대장이 수류탄 가지고 적 탱크를 저지할 사람을 뽑는다고 해 자원했는데, 이는 수색대원을 모집하기 위한 연막이었다. 수색대원이 되어 도로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후퇴하던 적의 마차 3대와 적군을 폭사시키기도 했다”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지원이 없었으면 우리는 수류탄, 야포, 박격포 한발도 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지부장이 기억하는 백선엽 사단장은 무섭지만 따뜻한 지휘관이다. 1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국민학교서 백 사단장을 처음 봤다.

그는 “처음 본 사단장님은 무서웠다. 큰 덩치와 철모에 시커먼 보안경을 걸친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면서, “그러나 북진 과정에 박격포 포신을 메고 가는 병사를 보면 자신이 대신 메고, 지프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담배연기를 흩날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정말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고 백선엽 장군님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하고, 개탄스럽습니다. 만약 다부동이 뚫렸다면 대구와 부산이 함락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의 형제자매, 전우의 목숨을 빼앗고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인 북한을 적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그들은 다부동전투 영웅 백 장군님을 입에 올릴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매일신문 이영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