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 지 15년, 홍남순 변호사님-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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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 15일은 홍남순 변호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15주기가 되는 날이다.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다. 구 전남도청 영결식장에서 우리 모두가 통곡하면서 떠나보내 드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5주기라니, 이렇게 세월이 빠르단 말인가. 며칠 뒤면 맞이할 기일이라선지 유독 홍 변호사님이 그리워진다. 책장에 꽂혀 있는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2004, 나남출판사)이라는 제목의 홍남순평전을 꺼내서 읽다 보니, 홍 변호사님의 위대한 민주 투쟁에 머리를 숙이게 되면서 회고의 감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평전 최종 집필자가 쓴 대로 홍 변호사 님은 ‘행동하는 지식인’ ‘민주화운동의 대부’ ‘광주의 큰 어른’이라는 결론에 동의하면서 나의 생각도 전하고 싶다.
홍 변호사님의 아호는 취영(翠英)이다. 고향은 화순군 도곡면 모산리(지금은 효산리). 그곳에서 1912년 한학자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큰 뜻을 품고 일본에 밀항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해방된 46년 34세에 광주지방법원 화순 등기소장에 취임하였고, 그 다음 다음 해인 1948년 36세에 조선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53년 41세에 그 유명한 광주시 궁동15번지에 법률사무소를 개설해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에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군복무를 마친 뒤 195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고등법원 판사에 올랐다. 61년 강경지원장, 62년 광주고법판사를 마지막으로 법관 생활을 마치고 63년 1월부터 변호사로서 영원한 재야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궁동15번지는 광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사랑방이 되었다.
홍 변호사님의 날개와 우산 밑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며 반독재운동에 참여했다. 소설가 송기숙 교수와 나는 이른바 ‘홍·송·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민주화운동 한복판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홍 변호사님의 호칭에 ‘대로’(大老)를 추가하자는 논의로 ‘취영대로’라는 호칭 봉정식을 추진하게 됐다. 옛날 주(周)나라 때의 태공망·이윤·백이·숙제와 같은 ‘국가의 대로’라는 존칭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대로론’(大老論)이라는 글을 써, 그 무자비한 군부독재 시대에 탄압받던 민주인사들을 무료변론하느라 전국 방방곡곡의 법원을 쫓아다니던 홍 변호사님의 노고를 위로하는 일에 앞장섰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구속된 학생이나 민주인사, 69년 삼선개헌 반대 운동으로 구속된 이들, 71년 교련 반대 데모의 구속자들. 홍 변호사님은 그들 모두가 재판을 받게 되면 무료 변론으로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셨다. 그러면서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전남도위원장 등 온갖 민주화운동 단체의 지도자가 되어 대중운동의 선봉장으로도 활동하였다. 71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전남대표위원이 되셨고, 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대표 상임위원에 피임되어 반유신운동에 앞장서서 투쟁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수시로 정보과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류되거나 수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 변호사님의 민주화운동의 대단원은 80년 군부독재의 5·18 양민 학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끝내는 ‘내란 중요 임무종사’ 라는 죄명으로 상무대 영창에 억류된 일이다. 변호사님은 무서운 고문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법정은 무기징역이라는 중벌을 내려 70 노인을 감옥에 투옥시키고 말았다.
광주·전남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고생할 때, 백발노인이 수갑을 차고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하던 모습을 나는 언제나 잊지 못한다. 나도 함께 구속된 몸이어서 불안에 떨고 근심에 잠겨 있었지만, 뵈올 때마다 환한 얼굴 표정으로 근심 걱정 없이 대해 주던 홍 변호사님의 모습은 역시 대인다웠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출소하였지만, 취영대로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군부 악당들의 죄를 묻기 위해 앞장서서 싸우는 일에 쉬는 날이 없으셨다. 구속자협회의 회장으로, 광주민중혁명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우는 전열의 최전선에서 탁월한 투쟁을 전개해 주셨다.
인권변호사, 민주투사, 국가 대원로 즉 우리 시대의 마지막 ‘대로’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해 주신 ‘광주의 무등산’이 바로 취영대로였다. 며칠 뒤면 15주기인데, 아직도 기념관이 세워지지 못한 채 궁동 15번지 민주화운동의 사랑방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기념사업회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인데, 광주시가 적극 지원함으로써 홍 변호사님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홍 변호사님의 날개와 우산 밑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며 반독재운동에 참여했다. 소설가 송기숙 교수와 나는 이른바 ‘홍·송·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민주화운동 한복판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홍 변호사님의 호칭에 ‘대로’(大老)를 추가하자는 논의로 ‘취영대로’라는 호칭 봉정식을 추진하게 됐다. 옛날 주(周)나라 때의 태공망·이윤·백이·숙제와 같은 ‘국가의 대로’라는 존칭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대로론’(大老論)이라는 글을 써, 그 무자비한 군부독재 시대에 탄압받던 민주인사들을 무료변론하느라 전국 방방곡곡의 법원을 쫓아다니던 홍 변호사님의 노고를 위로하는 일에 앞장섰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구속된 학생이나 민주인사, 69년 삼선개헌 반대 운동으로 구속된 이들, 71년 교련 반대 데모의 구속자들. 홍 변호사님은 그들 모두가 재판을 받게 되면 무료 변론으로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셨다. 그러면서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전남도위원장 등 온갖 민주화운동 단체의 지도자가 되어 대중운동의 선봉장으로도 활동하였다. 71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전남대표위원이 되셨고, 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대표 상임위원에 피임되어 반유신운동에 앞장서서 투쟁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수시로 정보과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류되거나 수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 변호사님의 민주화운동의 대단원은 80년 군부독재의 5·18 양민 학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끝내는 ‘내란 중요 임무종사’ 라는 죄명으로 상무대 영창에 억류된 일이다. 변호사님은 무서운 고문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법정은 무기징역이라는 중벌을 내려 70 노인을 감옥에 투옥시키고 말았다.
광주·전남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고생할 때, 백발노인이 수갑을 차고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하던 모습을 나는 언제나 잊지 못한다. 나도 함께 구속된 몸이어서 불안에 떨고 근심에 잠겨 있었지만, 뵈올 때마다 환한 얼굴 표정으로 근심 걱정 없이 대해 주던 홍 변호사님의 모습은 역시 대인다웠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출소하였지만, 취영대로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군부 악당들의 죄를 묻기 위해 앞장서서 싸우는 일에 쉬는 날이 없으셨다. 구속자협회의 회장으로, 광주민중혁명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우는 전열의 최전선에서 탁월한 투쟁을 전개해 주셨다.
인권변호사, 민주투사, 국가 대원로 즉 우리 시대의 마지막 ‘대로’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해 주신 ‘광주의 무등산’이 바로 취영대로였다. 며칠 뒤면 15주기인데, 아직도 기념관이 세워지지 못한 채 궁동 15번지 민주화운동의 사랑방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기념사업회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인데, 광주시가 적극 지원함으로써 홍 변호사님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