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동 문화2부장·편집국 부국장] 언제까지 이념의 감옥 속에 가둬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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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0월 20일 광주지방법원 1호 법정.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비밀결사 모임 성진회(醒進會)와 관련해서 장재성(당시 22살) 등 35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 일본 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보안법 제7조 위반’ 등 죄목을 붙여 징역 7년부터 1년까지 중형을 구형했다. 검사의 전례 없는 구형이 끝나자 35명의 피고들은 ‘법정이 문허질 만치(무너질 만큼) 고성대소(高聲大笑)’하였다.
1주일 후인 10월 27일 궁본(宮本)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판결했다. 광주 학생독립운동 관련 판결 가운데 최고로 높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은 장재성은 재판장을 불러 세우고 방청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 학생이 과학(科學)을 연구한 사건에 치안을 방해하였다고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는 것은 절대 반대요. 조선학생 만세!”(동아일보 1930년 10월 28일자)
당시 1심 신문기사를 들추다 보면 청년 장재성과 학생들의 항일 의기(義氣)가 느껴진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은 서울과 원산 등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확산되며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래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킨 중추적 인물이 광주 출신인 장재성(1908~1950) 선생이다. 그런 만큼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로서 당연히 정부의 인정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광복 후 선생의 조선공산당 가입 경력 때문이다.
광주 시내에 남아 있는 장재성 선생의 발자취는 희미하다. 광주시 동구 금남로 4가 금남로 공원에 옛 ‘장재성 빵집’과 ‘김기권 문방구점’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을 뿐이다.
성진회 결성 독립운동가 장재성
1908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현재의 동구 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다니던 1926년 11월 3일에 왕재일·최규창·안종익·박인생 등 15명의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결성한다. 모임 이름은 ‘깨달아(醒) 나아가자(進)’는 의미를 담았다. 총무에 왕재일, 서기에 박인생, 회계에 장재성 등 집행부를 꾸려 조선독립을 염두에 둔 독서와 토론을 비밀리에 했다.
선생은 광주고보 졸업 후 도쿄 주오(中央)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각 학교 독서회를 연결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 책임비서를 맡았다. 이때 현재의 금남로공원 자리에 있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을 임대해 ‘장재성 빵집’을 운영하며 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1929년 11월 3일 선생은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용감한 조선인의 기상이었고 또한 대승리였다”고 격려하면서, 투쟁 대상을 일본 제국주의로 돌려 대규모 집단 가두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1월 12일 이어진 제2차 시위에서도 성진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등 네 종류의 격문을 작성했다.
역사적 재평가와 서훈 이뤄져야
장재성 선생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과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전남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48년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뒤 이듬해 4월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갇혔다. 그런데 선생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120여 명의 좌익 사범들과 함께 북구 산동교 인근 ‘불갱이 고개’(불공 고개: 당시 광주 광산군 극락면 동림리)로 끌려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국군 5사단 헌병대에 의해 즉결 처형됐다. 최근 일부러 찾아가 본 집단학살 현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5·16 직후인 1962년 해방 후 처음으로 시행된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에서 내각 사무처는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있다’라며 장재성 선생의 서훈을 취소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자에 대한 서훈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2020년 같은 이유로 선생의 재신청을 보류했다. 이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일지라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가지고 나누는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은 정당한 역사적 재평가와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줌) 사업이 절실하다. 오는 5일은 선생이 마흔두 살 한창 나이에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지 꼭 71년이 되는 날이다. /song@kwangju.co.kr
당시 1심 신문기사를 들추다 보면 청년 장재성과 학생들의 항일 의기(義氣)가 느껴진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은 서울과 원산 등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확산되며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래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킨 중추적 인물이 광주 출신인 장재성(1908~1950) 선생이다. 그런 만큼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로서 당연히 정부의 인정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광복 후 선생의 조선공산당 가입 경력 때문이다.
성진회 결성 독립운동가 장재성
1908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현재의 동구 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다니던 1926년 11월 3일에 왕재일·최규창·안종익·박인생 등 15명의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결성한다. 모임 이름은 ‘깨달아(醒) 나아가자(進)’는 의미를 담았다. 총무에 왕재일, 서기에 박인생, 회계에 장재성 등 집행부를 꾸려 조선독립을 염두에 둔 독서와 토론을 비밀리에 했다.
선생은 광주고보 졸업 후 도쿄 주오(中央)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각 학교 독서회를 연결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 책임비서를 맡았다. 이때 현재의 금남로공원 자리에 있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을 임대해 ‘장재성 빵집’을 운영하며 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1929년 11월 3일 선생은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용감한 조선인의 기상이었고 또한 대승리였다”고 격려하면서, 투쟁 대상을 일본 제국주의로 돌려 대규모 집단 가두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1월 12일 이어진 제2차 시위에서도 성진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등 네 종류의 격문을 작성했다.
역사적 재평가와 서훈 이뤄져야
장재성 선생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과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전남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48년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뒤 이듬해 4월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갇혔다. 그런데 선생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120여 명의 좌익 사범들과 함께 북구 산동교 인근 ‘불갱이 고개’(불공 고개: 당시 광주 광산군 극락면 동림리)로 끌려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국군 5사단 헌병대에 의해 즉결 처형됐다. 최근 일부러 찾아가 본 집단학살 현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5·16 직후인 1962년 해방 후 처음으로 시행된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에서 내각 사무처는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있다’라며 장재성 선생의 서훈을 취소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자에 대한 서훈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2020년 같은 이유로 선생의 재신청을 보류했다. 이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일지라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가지고 나누는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은 정당한 역사적 재평가와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줌) 사업이 절실하다. 오는 5일은 선생이 마흔두 살 한창 나이에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지 꼭 71년이 되는 날이다.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