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현-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슬기로운 ‘이건희 컬렉션’ 사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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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슬기로운 ‘이건희 컬렉션’ 사용서
2021년 05월 26일(수) 02:15
인구 2만여 명의 강원도 양구군은 요즘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양구 출신 ‘국민화가’ 박수근 화백 생가터에 들어선 ‘박수근 미술관’을 둘러보기 위해 이달 초부터 방문객들이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 미술관이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건 바로 ‘이건희 컬렉션’ 덕분이다. 지난달 28일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 유가족이 기증한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을 공개한 특별전 ‘한가한 봄날, 고향으로 돌아온 아기 업은 소녀’(5월6일~10월17일)를 ‘직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예년보다 2~3배나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는 것이다.



분주한 대구, 너무 조용한 광주



대구미술관 역시 최근 ‘갑작스러운’ 특별전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른 미술관들이 코로나19로 예정된 전시회를 연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올해 전시 일정에 없었던 이건희 컬렉션을 선보이는 ‘웰컴 홈’(6월29~8월29일)전을 기획한 것이다. 이 회장 유족으로 부터 대구 출신 이인성 화백의 작품 등 한국 근대미술 12점을 기증받은 후 별도의 상설전시실을 확보했다. 당초엔 오는 12월 공개할 계획이었지만 시민들의 문의가 쇄도하자 일정을 앞당겼다고 한다.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1488점을 품에 안은 국립현대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컬렉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내년에 열기로 한 계획을 앞당겨 오는 7월 덕수궁관에서 먼저 일부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어 오는 8월엔 서울관에서 총 3부로 나눠 내년 3월까지 테마별로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처럼 최근 국내 문화예술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이건희 컬렉션’이다. 이 회장의 유족으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은 지자체와 그렇지 못한 지자체의 희비가 엇갈릴 정도다. 급기야 이건희 컬렉션의 향방을 놓고 지자체들 간에 치열한 유치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이 회장의 기증 정신을 살리고 좋은 작품을 국민이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나오면서 부산·대구 등 20여 곳의 지자체들이 삼성가의 인연 등 온갖 ‘스토리’를 앞세워 미술관 유치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은 대구시다. 고 이 회장의 출생지라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 대구는 특별전 ‘웰컴 홈’을 비롯해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꾸린 유치위원회를 통해 본격적인 실무 작업에 착수했다. 올 하반기 착공 예정인 간송미술관의 전통미술과 대구시립미술관의 현대미술 및 지역 근대미술(이건희컬렉션)을 연계해 대한민국 대표 시각 클러스터를 구축한다는 ‘큰 그림’이다.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일부 지자체의 ‘이건희 컬렉션’ 모시기와 달리 광주시의 행보는 참으로 느긋하다. 아니 너무나 조용해서 이상할 정도다. 삼성으로부터 오지호·이중섭·김환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5명의 작품 30점을 기증받은 광주시립미술관은 언론에 기증작 리스트를 공개한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다른 미술관들이 기증작들에 대한 ‘브랜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반해 개관 20주년인 내년 8월에야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다.

사실 올해 전시 계획이 모두 확정된 상황에서 예정에 없는 전시회를 일정에 끼워 넣는 건 예산 확보 등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재의 시립미술관 규모로는 이건희 컬렉션을 위한 상설 공간 마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여건을 이유로 1년 후에나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건 한가해도 너무나 한가한 것 아닌가 싶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는 데 말이다. 더욱이 대구 등 다른 도시들의 이건희 컬렉션을 벤치마킹해 도시의 브랜드를 높이고 관광자산으로 키우려는 ‘장밋빛 비전’도 찾아볼 수 없다.



‘리움미술관’ 분관 유치 어떤가



이건희 미술관 유치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넘어간 2만3000여 점의 컬렉션을 지자체에 다시 나눠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세기의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건희 소장품을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활용하려는 비전과 의지조차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최근 미술계 일각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계기로 한때 지역의 핫이슈였던 ‘삼성미술관 리움’(리움미술관) 분관 유치에 다시 나서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1만5000여 점에 달하는 리움미술관 컬렉션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118호)등 다수의 국보와 보물 및 아니시 카푸어·루이스 부르조아·제프 쿤스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만약 리움분관이 광주시 남구 용산동 일대로 옮겨 가는 동부경찰서 자리 등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근에 들어선다면 대인예술시장이나 예술의 거리와 함께 엄청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청사진을 현실화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광주는 비엔날레 개최 도시인 데다 국립 기관인 아시아문화전당의 활성화라는 확실한 대의명분도 있지 않나. 무엇보다 광주에 오는 이건희 컬렉션이 도시 브랜드로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시는 지금부터라도 긴 호흡으로 리움분관을 유치할 수 있도록 ‘정치력’과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문화 광주’의 장밋빛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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