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한국영화 100년 <18> 3S정책과 ‘애마부인’
에로영화가 장악한 1980년대…신군부 정권유지 일등공신
신군부, 국민들 정치적 관심 돌리기 위해
‘3S - 스크린·섹스·스포츠’ 우민화정책 수립
‘애마부인’ ‘어우동’ ‘변강쇠’ 등 흥행 이어져
비디오산업으로 확장 … 에로비디오 제작 붐
“자율적 판단 안된 우매한 대중 만든다” 비판도
2019년 09월 25일(수) 04:50
영화 ‘어우동’ 주연 이보희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입과 귀를 총칼로 틀어막았던 신군부는 권력에 권위가 없었던 이유로 국민의 자발적 복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래저래 신군부는 국민들의 관심사를 다른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전두환과 노태우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일본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를 소개받게 된다. 세지마 류조는 만주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직속상관으로 1965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한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인사였다.

1980년 6월 세지마 류조는 학살의 주범들을 만나서, 3S정책을 제안하게 된다. 일본이 패전 후에 미군정에 의해서 도입된 정책들 중 하나였던 3S정책은, 국민들이 스크린, 섹스, 스포츠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우민화정책이었다. 그렇게 신군부의 3S정책이 실시되었다. 1981년에 ‘국풍81’이 있었고, 1982년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며, 두발과 교복도 자율화했다. 그리고 프로스포츠를 출범시켰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1983년에는 프로축구와 민속씨름이 열렸다.

한국영화 역시 이런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3S정책을 수립하던 초기 신군부의 핵심 세력가였던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는 젊은 감독들을 만나게 된다. 3명의 허씨는 감독들에게 ‘어떤 장르를 풀어주면 좋겠냐’고 물었고, 정인엽감독 등은 성인영화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애마부인’(1982·정인엽)이었다.

남편의 무관심과 외도로 몸도 마음도 상처 입은 유한부인의 성적 순례를 담은 ‘애마부인’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설정과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펼쳐 보이며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애마부인’은 신군부가 풀어 준 통금해제를 이용해 최초로 심야상영을 편성하는 등 한국 영화에 이른바 ‘에로영화’ 붐을 불러일으킨 영화가 되었다. 그렇게 이 시기 한국영화는 관객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고 성적 호기심을 충동질하는 영화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애마부인’은 이후 13편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시리즈가 되었고, 안소영을 섹스심벌로 만들어주었다. 안소영은 1982년 한 해에만 7편의 성애영화에 출연했다. ‘산딸기’도 그 중 한편이었는데, ‘산딸기’ 역시 6편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시리즈의 2편과 3편의 주인공이었던 선우일란은 남성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빨간 앵두’(1982) 역시 8편까지 시리즈가 이어졌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성적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유부녀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빨간 앵두’는 ‘애마부인’과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당대를 대표했던 이장호감독과 이두용감독 역시 에로영화를 내놓았다. ‘무릎과 무릎사이’(1984·이장호)는 이보희의 파격적인 노출 연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10대 남학생들이 동시상영관에 몰려들었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여성의 성적욕망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성적 에너지가 넘치고, 몇몇 섹스 장면의 표현방식은 탁월하다. ‘어우동’(1985·이장호)은 칠거지악과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해 있던 조선 성종 때를 배경으로,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맞은 어우동(이보희)이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양반 사회를 희롱하는 영화다. 이장호감독의 두 편의 영화는 크게 흥행하며 에로영화 전성시대를 이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어우동’의 성공에 힘입어 에로영화는 과거를 시공간으로 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뽕’(1985·이두용)과 ‘변강쇠’(1986·엄종선)등이 그 영화들인데, 한국 에로영화를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는 영화들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뽕’은 가난한 농촌에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사내들에게 몸을 파는 아내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민초들의 삶과 시대 정서가 녹아있고, 서민들의 성이 원색적으로 표현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안협댁’을 연기한 이미숙의 농염한 섹스 연기는 으뜸이었다.

‘변강쇠’(1986)는 전통 해학극과 에로티시즘을 대중적으로 결합시키며 크게 성공했다. 변강쇠 이대근과 옹녀 원미경이 만나 합궁할 때, 천지가 진동하고 북극곰이 얼음에서 미끄러진다는 과대망상의 유머는 당시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변강쇠’역시 시리즈로 제작되었으며, ‘가루지기’(1988·고우영), ‘고금소총’(1988·지영호)등 토속 에로물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내내 계속된 에로영화의 정점은 ‘매춘’(1988·유진선)이었다. 영화에 앞서 연극무대에 올려진 ‘매춘’은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란이 분분했고, 영화로 만들어져서도 강도 높은 베드신과 과감한 노출을 무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애마부인’으로 에로영화의 포문을 연 정인엽감독은 ‘파리 애마’(1988)를 내놓으며 에로영화의 공간을 해외로까지 확장시켰다. 파리 로케이션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남편과 이혼한 여주인공이 프랑스 청년을 만나 펼치는 뜨거운 사랑을 담고 있다.

이렇듯 80년대의 한국영화는 정치적으로 억눌렸던 분출구를 섹스로 풀고자 했던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로 에로영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이 흐름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고, 비디오산업이 팽창하면서 소프트포르노라고 할 만한 에로비디오의 폭발적 제작 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찍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은 스크린, 섹스, 스포츠 같은 현대의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사람들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을 떨어뜨려 우매한 대중으로 만든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3S정책이라고 하는 자유화정책을 펼치며 국민들을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초중반 내내 만들어지고 소비된 ‘에로영화’는 신군부가 국민들로부터 별다른 저항 없이 정권을 유지하게 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 대 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