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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식 칼럼-논설실장·이사] 5·18 진상 규명 ‘골든타임’이 지나고 있다
2019년 09월 25일(수) 04:50
내년이면 40주년을 맞이하는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와 세계가 공인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이정표다.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돼 해마다 정부 주관 기념식이 열리고 있고 2011년에는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럼에도 ‘오월 광주’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날의 진실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 인권 유린 등 핵심 의혹이 규명되지 않은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 활동이 몇 차례 있긴 했다. 1988년 국회의 광주특위와 청문회, 1995년 검찰의 12·12 및 5·18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 조사가 그것이다. 오월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끈질긴 요구가 그 동력이 됐다. 덕분에 신군부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과 국가 폭력의 실체가 일부 드러났다.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유공자 명예 회복과 보상도 진행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밝혀진 진상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는 반쪽에 그쳤다.

오월의 진실이 여전히 어둠에 갇혀 있는 것은 당시 신군부 정권의 조직적인 은폐와 조작, 관련자들의 비협조, 정치적 타협 등으로 조사 때마다 한계에 부딪힌 탓이다. 이로 인해 국가 차원의 보고서조차 아직 없는 실정이다. 그 부실한 토대 위에 보수 정권과 정당들은 5·18을 끊임없이 왜곡·폄훼하며 흔들어 대고 있다.

오월 진상 규명의 새로운 단초가 된 것은 지난 2016년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150여 발의 탄흔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식 결과 헬기에서 무차별 발사된 총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동안 광주 시민들의 잇단 증언에도 ‘헬기 사격은 없었고 도청 앞 사격은 상부 명령 없이 현장에서 이뤄진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해 온 신군부와 군 당국의 억지 논리가 정부 기관에 의해 뒤집어졌다.

2017년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 대기 등을 규명하기 위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조사위는 5개월간의 조사 끝에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지만 강제 조사권이 없어 구체적인 발사 경위와 최종 명령자가 누구인지 등 핵심 의혹을 규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진상 규명 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국회에서는 김동철·이개호·최경환 의원 등 지역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5·18 진상 규명 특별법’을 발의했다. 논란 끝에 지난해 2월 28일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특별법의 핵심은 5·18 강제 진압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동안 5·18과 관련 피해자·희생자 보상, 유공자 예우, 전두환·노태우 처벌을 위한 특별법은 제정된 바 있으나 진상 규명만을 위한 법안은 처음이었다. 38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조사 기간은 위원회 구성을 마친 날부터 2년간으로 하되 1년의 범위에서 연장이 가능하도록 했다.

특별법은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지난해 9월 14일부터 시행됐지만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나도록 진상조사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장이 한 명, 여당과 야당이 각각 네 명을 추천해 모두 아홉 명으로 구성되는 조사 위원의 추천과 임명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안종철 한국현대사회연구소장을, 더불어민주당은 송선태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와 민병로 전남대 교수 및 이성춘 송원대 교수와 서애련 변호사를, 바른미래당은 오승용 전남대 교수를 각각 추천했다.

문제는 자유한국당이다. 한국당은 극우 논객 지만원 씨 등을 거론하다 지난 1월에야 권태오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처장과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차기환 변호사 등 세 명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5·18을 폄훼한 전력이 드러나 오월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했고, 문 대통령은 권 전 처장과 이 전 기자가 특별법상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임명을 거부하고 재추천을 요청했다. 이후 한국당은 적합한 인물이 없다며 추천을 또다시 미뤘다. 급기야 여야는 지난 4월 위원 자격에 ‘군 경력 20년 이상’을 추가하는 개정안 처리에 합의했지만, 이 역시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하다가 지난 17일에야 겨우 국회 국방위원회 소위원회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여야가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극한 대립으로 치달아 연내 법안 처리와 진상조사위 출범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5·18 40주년 기념일이 불과 7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은 오월 진상 규명의 골든타임이자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수반인 문 대통령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7년 5·18 기념식에서 “헬기 사격까지 포함해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 왜곡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등 수차례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언론 보도와 학계의 연구를 통해서도 숨겨졌던 진실들에 대한 새로운 증거와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5·18묘지를 참배하고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것도 가해자 측의 참회와 고백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진상조사위의 활동을 토대로 국가 공인 보고서를 채택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5·18을 만드는 일은 이제 국회와 정치권의 노력에 달려 있다.

설사 연내 조사위가 출범한다 해도 초기 6개월은 조사 설계와 준비로 훌쩍 지날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내년 4·15 총선이 끼어 있고 여기서 여야의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기면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현 정부 후반기에 접어들고 대선이 성큼 다가오면 관련 부처와 기관들이 조사에 적극 협력한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여당인 민주당은 지금 바로, 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역사적 소명 의식을 갖고 직접 챙겨야 한다. 한국당도 광주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 오월이 더 이상 분노와 슬픔이 아닌 국민 통합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