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이 행복한 ‘문화갑질’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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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이 행복한 ‘문화갑질’이라면
2018년 04월 25일(수) 00:00
박진현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뉴욕의 메디슨 애비뉴 75번가를 걷다 보면 피라미드를 엎어놓은 듯한 건물이 눈에 띈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가 설계한 휘트니 미술관이다. 기능적이고 단순함이 돋보이는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다.

휘트니 미술관은 1930년 미국 전역에 철도를 건설한 철도왕 밴더빌트 가(家)의 손녀인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1875∼1942) 여사가 수집한 700여 점의 컬렉션으로 출발했다. 경제형편이 어려운 젊은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하나 둘씩 구입해준 게 ‘휘트니 컬렉션’의 뿌리가 됐다.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모마)은 기업들의 메세나로 성장한 ‘국민 미술관‘이다. 석유왕 록펠러 가문의 후원으로 1929년에 문을 연 모마는 내로라하는 미국 재벌들의 메세나를 기반으로 회화, 조각, 사진, 영화 등 20만여 점을 보유한 ‘현대미술의 메카’다.

무엇보다 어린이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은 모마의 자랑거리다. 특히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 패밀리 프로그램’(Ford Family Program)은 뉴욕의 공공브랜드가 됐다. 포드사는 계약을 체결할 당시 모마측에게 “교육 프로그램 이외에 지원금을 사용하면 즉각 회수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포드사의 ‘갑질’ 덕분에 포드 패밀리에 참가하는 뉴요커들은 무료로 미술관 투어, 작가와의 대화 등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고 있다.

최근 국제미술계의 이슈메이커는 단연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다. 시카고 중심가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얼마 전 경마산업(듀코소아 그룹)으로 부를 일군 자넷 & 크래그 듀코소아(Janet & Craig Duchossois)부부와 투자자문 회사 CE0 출신인 로버트& 다이앤 레비 부부(Robert & Diane Levy)로 부터 각각 5천만 달러, 2천만 달러 등 총 7천만 달러(한화 748억 원)를 후원 받았다. 시카고를 연고로 수십 년 간 비즈니스를 해온 두 기업은 “우리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시카고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라며 “시민들의 문화쉼터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가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거듭나는 데 보탬이 되길 희망한다”며 기부배경을 밝혔다.

이 같은 미국 기업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는 요즘 ‘물벼락’과 ‘비서갑질’ 등으로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는 일부 국내 기업인의 무개념 행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천문학적인 기금을 내놓다 보니 미국의 재벌들 역시 ‘요구사항’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180도 다르다. 표면적으론 조건없는 지원을 내세우지만 미술관측이 시민들을 위한 공적 용도에 후원금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없던 일’ 운운하며 깐깐하게 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이런 근사한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공공이 행복해지는 ‘문화갑질’이라면 눈감아 줄 수도 있는데.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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