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지도 못하는 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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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지도 못하는 개라면…
신 항 락
이사·논설주간
2013년 08월 21일(수) 00:00
옛말에 ‘물지도 못하는 개라면 짖지도 말라’고 했다. 경계 차원에서 짓다가도 위급 시에는 물어버리는 것이 개의 본능이다. 본능을 상실한 개는 더 이상 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인간은 본능보다는 이성이 더 크게 작용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물더라도 이성이 전제가 된다. 그 이성은 강하고, 집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지금 서울광장에서는 지난 6월 말부터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이 켜지고 있다. “댓글 아닌 민주주의가 삭제되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기록적인 폭염에도 연일 촛불이 타오른 것은 국민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걸 의미한다.

민주당도 1일부터 20일째 ‘천막당사’를 펼치고, 촛불집회에 동참하고 있다. 민주당이 ‘거리 정치’에 나선 것은 새누리당과 더 이상 얘기가 안 되니 국민을 상대로 직접 호소해야겠다는 ‘배수진’에 가깝다. 국정원과 여당의 방해 공작이 결국 민주당으로 하여금 마지노선을 택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민주당도 국정조사 무력화의 ‘공범’이라는 데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많은 국민들은 정부·여당에 분노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소위 진보 여론의 논조만 봐도 그렇다.

민주당의 잘못된 대응으로 인해 국민들이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과 경찰의 수사 은폐라는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를 단순한 여야간의 정쟁으로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국정조사를 희석시키기 위한 국정원과 여당의 북방한계선(NLL) 논쟁에 뛰어들어 문제의 초점을 흐렸을 뿐 아니라 이후 전개된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무능과 무기력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난 16일 우여곡절 끝에 열린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 두 핵심 증인에 대한 청문회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증인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범죄 사실조차 부인하는 등 국민을 농락했지만 ‘변호인 같은 여당과 전략 부재의 야당’은 어김이 없었다.

19일 2차 청문회에서도 강한 여당의 ‘방패’에 무딘 야당의 ‘창’은 속수무책이었다. 23일 국정조사가 사실상 종료되지만 민주당이 지금까지 얻은 건 전무해 보인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정국을 이끌어갈 전략도, 새누리당을 압박할 지렛대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끌려다녔을 뿐이다.

국민들이 허울 뿐인 국정조사로 전락하고, 민주당이 들러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정조사의 칼날이 정부·여당을 겨냥할 진데 목을 내놓으리라고 민주당이 생각했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민주당이 대통령 사과와 국정원 개혁,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셀프 개혁’ 한 가지만 주문하고 일축한 것도 결과적으로 민주당 내부에 있는 셈이다. 대선 패배 이후 끊임없이 전개된 내분이 국정조사에까지 전이되면서 마침내 집단 갈등을 키워 화를 자초한 것이다.

지금 민주당은 위기다. 인물도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127석의 거대 야당이지만 존재감은 없다. 수십석의 의석으로 국민을 등에 업고 정국을 돌파해온 역대 야당과 과거 5공 청문회 등에서 선배 야당의원들이 보여준 투지와 열정, 빛나는 성과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초라한 모습이다.

이제 민주당이 가야하는 길은 정도(正道)의 큰 길만이 있을 뿐이다. 먼저 내부적으로 친노니, 비노니 하는 파벌부터 말끔히 털어내야 한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도 자신을 빗댄 계파싸움이 역겨울 것이다.

적어도 천막당사에서 “오늘자로 민주당엔 파벌이 없으며 깨끗한 정치, 민생과 경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더욱 정진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또한 강한 리더십 창출과 비전을 갖춰 일사불란한 체제로 국민에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강한 야성(野性)을 바탕으로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광장정치’를 통해 정부·여당을 압박하면서도 민생과 예산 등과 관련한 현안에 대해서는 국회에 등원해 상생정치를 펴야 한다. 청와대 회동과 같은 선물에 ‘회군’한다면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촛불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민당 총재 시절 기초·광역자치단체 선거에서 정당 추천제를 배제하려한 민자당에 맞서 ‘13일 단식’한 끝에 지방자치제 협상을 타결짓고 국회를 정상화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한나라당 대표 당시 정부·여당이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정치 일정을 전면 중단한 채 53일간 장외투쟁을 전개해 ‘사학법 전면 재논의’라는 양보를 받아냈다. 강한 야당과 정공법의 결과다.

‘물지도 못하는 개라면 짖지도 말라’고 했다. 하물며 야당이 물고 늘어지지도 못하는 데서야.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호남사람들이 유례없는 무더위에 체감하는 ‘분노지수’가 더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hlshin@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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