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소파와 여배우 가가와 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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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소파와 여배우 가가와 교코
2013년 07월 17일(수) 00:00
낡은 흑백 필름 속 그녀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막 상영이 끝난 1965년 작품 ‘붉은 수염’에서 그녀는 광기 어린 여자였다. 청순한 모습의 그녀가 갑자기 돌변, 기모노 끈으로 살인을 자행하는 장면은 섬뜩했다.

광주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20일까지)에 13일 특별한 손님이 다녀갔다. 1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일본 대표 여배우 가가와 교코. 올해 여든 두살의 그녀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비롯해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 등 내로라하는 일본 거장들과 작업한 명배우다.

그녀의 한국행(行)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이나 ‘영화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부산이 아닌, 광주에서 유일하게 행사를 진행한 건 광주사람들에겐 참 행복한 일이었다. 구로사와 특별전 역시 광주와 서울 두 곳에서만 열리고 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구로사와 감독과 작업한 소회 등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서울에서 일부러 다니러 온 영화팬의 질문에는 감사의 마음도 표했다.

다음날 인터뷰 차 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단아한 모습의 그녀는 여든 둘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막 씻어낸 것 같은 느낌의 배우”라 칭했다는 게 이해가 됐다. 곁에 앉은 평론가 오타케 요코씨가 칭찬을 할 때마다 수줍어 하는 모습이 꼭 ‘소녀’같았다.

외람되게도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인터뷰 내용과 별개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기운을 간직한 그녀 덕에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가와씨는 지금도 활동하는 현역 배우다. 오타케씨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드문 경우라고 한다. 특히 여배우들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 중년이 되면서부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하는 배우가 많단다. 그런 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만나는 그녀는 일본 영화계의 귀한 존재라고 자랑했다.

20년 인연을 맺어온 요코씨는 그녀의 롱런 비결로 “인생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며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꼽았다. 항상 손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대배우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하는데”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한결같은 모습이 ‘82세 현역배우’를 가능케 했다는 설명이었다.

지난 8일 광주일보를 받아든 독자들은 마음이 ‘짠해지는’ 기사와 사진 한장을 접했다. 101세로 세상을 떠난 정소파 시인의 사진이다. 하얀 모시 한복을 차려입고 파안대소하는 시인의 모습은 꼭 ‘소년’같았다.

타계하기 한달 전 인터뷰를 다녀온 후배 기자는 당시 “노시인의 모습은 욕심이 다 빠져나가고 인자함과 친근감,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한장의 사진’에서 후배 기자의 느낌을 그대로 받았다.

지난해 100세를 기념한 그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늘 하던 대로’라는 구절이었다. ‘늘 하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 작품 구상을 하고 아침을 먹은 뒤 시와 시조를 쓰고 운동을 한다’는 대목.

최근 감명깊게 읽은 책 중 하나가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신문 부음을 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무 인연도 없는 죽은 자를 애도한다. 그는 죽음을 대할 때마다 딱 세가지만 묻는다. “돌아가신 분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정 시인의 부음 기사를 접하고 이 책이 떠오른 건 필자가 ‘사랑’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의 세월을 살아낸 이가 마지막 남긴 미소와 말은 ‘나이듦’의 행복과 향기로움을 온전히 전해주었고, 나의 노년을 생각해 보게 했다. 감사드린다.

작은 일에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여배우 가가와 교코, 늘 하던 대로 100년을 살다 떠난 시인 정소파. 그들의 향기가 오랫동안 곁에 머물 것 같다.

가가와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 60세에 일본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마다다요’(18일·19일 광주극장) 와 ‘천국과 지옥’(18일)에서 그녀의 매력을 접해보시길.



/김미은 문화1부장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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