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명예, 국가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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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명예, 국가의 명예
2013년 07월 03일(수) 00:00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창설한 중앙정보부의 부훈(部訓)이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가 지었다는 이 슬로건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확대·개편된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에도 계속 사용됐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작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지향하면서 국가정보원이 된 뒤 원훈(院訓)은 ‘정보는 국력이다’로 변경됐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다시 바뀌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잇따른 조직 명칭과 부훈 변경에는 영욕의 역사가 투영돼 있다.

국정원은 지난 52년간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총성 없는 정보전쟁’으로 국가안보의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 국제정보는 물론 대북·방첩·테러·사이버·산업기밀 등 국내 보안정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보수집으로 국익의 현장을 지켜왔다.

반면, 불법 사찰과 도청 등을 통한 국내 정치개입과 간첩조작, 인권침해 등으로 ‘정권안보기관’이라는 오명도 써야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일본 도쿄에서 중정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 직전 미국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7년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은 야당인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 조직 폭력배를 투입(용팔이사건)하고, 수지 김 사건을 북한의 공작으로 조작했다.

‘문민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안기부 비밀도청조직인 ‘미림팀’이 1994년부터 3년간 정·재계 인사들을 무차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대선을 앞두고 ‘총풍’과 ‘북풍’ 등 공안사건 조작에 연루돼 정권교체 후 검찰에 구속됐고, 1999년 징역 5년형을 받았다.

최근에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대선·정치개입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그 뒤를 이었다. 검찰 수사 결과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지지·반대하는 인터넷 댓글을 올리도록 불법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이 대선 개입 의혹으로 집중포화를 맞는 사이 이번에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전문을 전격 공개해 파장이 일고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 발언’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 와중에 2급 비밀인 회의록 전문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일방적으로 까발린 것이다. 당장 “불법으로 불법을 덮으려는 것”, “물타기 시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남 원장은 한 발 더 나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밝혀 논란을 키웠다. ‘국익과 국가의 명예 보다 국정원의 명예가 우선’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발언으로, 국정원이 정략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보수 성향의 미국 경제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조차 ‘한국에선 정보기관이 누설자(Leaker)’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기밀문서로 분류된 대화록을 공개해 정치적 대립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했다.

음지에서 ‘무명의 헌신’을 해야할 국정원장들이 양지로 나와 정치 공방의 주인공이 되면서 국정원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전국 대학 교수·학생들을 비롯한 각계의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도 1일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기웃거리고 정치판에 뛰어들 때는 이미 지났다”면서 이번 기회에 국정원의 국내 정치 파트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사상 첫 국정조사가 2일부터 시작됐다. 다음달 15일까지 실시될 이번 조사는 정쟁의 무대가 아닌 실체적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국정원의 고질적인 정치개입 악습을 끊어내고, 정치적 중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전기가 돼야 한다.

그리하여 정권의 안위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행복’을 위한 정보 수집에만 전념하는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후식 정치부장·편집부국장 who@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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