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樹話 귀향’이 반갑지 않은 까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키가 크고 목이 길었다. 어느 날 조병화 시인이 왜 그렇게 목이 기냐고 묻자 거침없이 대답했다.
“잘 알다시피 난 섬사람이오. 때문에 항상 육지가 그리워 목을 길게 뺏더니 그만 목이 길어지고 말았소. 특히 내 고향 앞바다에서 일본 원양어선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미칠 것만 같았소. 그놈의 ‘부엉’하는 기적소리에 미쳐 노스텔지어에 빠지다 보니 목만 길어져 버렸다오.”
신안 안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그의 나이 20살때 ‘섬탈출’에 성공했다.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1933년 일본 도쿄 니혼대에서 4년 동안 그림을 배운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안채 옆에 초가로 된 화실을 지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앞에 아름답게 펼쳐진 초목, 학, 둥근 달을 그렸다.
하지만 이미 ‘바깥 세상’을 경험한 수화는 답답한 섬 생활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서울로 이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 여사(1916-2004)를 만났다. 1959년 4년간의 파리 유학을 마치고 홍익대 미대 교수로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1963년 돌연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조선의 달 항아리와 신안의 앞바다에 스며있는 한국적 정서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조형언어로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뉴욕에서 유행한 후기 색면추상 등에 영향을 받은 그는 단색조 화면에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하는 점화(點畵)를 그렸다. 수많은 점들을 찍으며 그가 생각했던 것은 고향 앞바다에 떠있던 달과 구름이었다.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는 1974년 뉴욕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됐다.
김환기 화백이 마침내 망향(忘鄕)의 한을 씻게 됐다. 지난 2일 신안군과 그의 아들 김화영 환기재단 이사장이 고인의 묘를 신안군 안좌도로 이장하기 위한 협약식을 체결했다. 군은 현재 미국 뉴욕시립공원묘지에 봉안돼 있는 김 화백 부부의 묘를 오는 2013년 안좌면에 개관하는 ‘김환기 미술관’ 부지에 마련할 계획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에 묘를 이장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한 그의 아들 말대로 뒤늦게 나마 고향의 품에 안기게 돼 다행스럽다.
하지만 그의 귀향이 마냥 반갑지 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신안군이 예산 79억여 원을 들여 건립중인 ‘김환기 미술관’에는 그의 유작이 없다. 어디 수화 뿐이랴. 현재 고흥군이 추진중인 천경자 미술관에도, 화순 동복에 위치한 오지호 기념관에도 이들 작가의 대표작이 거의 없다. 내년 5월 개관하는 경기도 양주군이 천경자 미술관의 작품 1천 200여점을 전시하는 것과 달리 채색화 2점과 드로잉 300점이 전부다. 만약 수화와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보고 싶다면 서울 환기미술관(60점 소장)과 양주 천경자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모처럼 건립하는 대가들의 미술관이 관광객들로부터 외면 받는다면 예의가 아니다. 이제 미술관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거장의 이름에 걸맞는 미술관으로 건립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신안 앞바다를 우주의 고향으로 승화시킨 수화의 ‘공’(功)을 간과해선 안된다.
//문화생활부장·jhpark@kwangju.co.kr
“잘 알다시피 난 섬사람이오. 때문에 항상 육지가 그리워 목을 길게 뺏더니 그만 목이 길어지고 말았소. 특히 내 고향 앞바다에서 일본 원양어선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미칠 것만 같았소. 그놈의 ‘부엉’하는 기적소리에 미쳐 노스텔지어에 빠지다 보니 목만 길어져 버렸다오.”
하지만 이미 ‘바깥 세상’을 경험한 수화는 답답한 섬 생활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서울로 이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 여사(1916-2004)를 만났다. 1959년 4년간의 파리 유학을 마치고 홍익대 미대 교수로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1963년 돌연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조선의 달 항아리와 신안의 앞바다에 스며있는 한국적 정서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조형언어로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뉴욕에서 유행한 후기 색면추상 등에 영향을 받은 그는 단색조 화면에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하는 점화(點畵)를 그렸다. 수많은 점들을 찍으며 그가 생각했던 것은 고향 앞바다에 떠있던 달과 구름이었다.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는 1974년 뉴욕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그의 귀향이 마냥 반갑지 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신안군이 예산 79억여 원을 들여 건립중인 ‘김환기 미술관’에는 그의 유작이 없다. 어디 수화 뿐이랴. 현재 고흥군이 추진중인 천경자 미술관에도, 화순 동복에 위치한 오지호 기념관에도 이들 작가의 대표작이 거의 없다. 내년 5월 개관하는 경기도 양주군이 천경자 미술관의 작품 1천 200여점을 전시하는 것과 달리 채색화 2점과 드로잉 300점이 전부다. 만약 수화와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보고 싶다면 서울 환기미술관(60점 소장)과 양주 천경자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모처럼 건립하는 대가들의 미술관이 관광객들로부터 외면 받는다면 예의가 아니다. 이제 미술관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거장의 이름에 걸맞는 미술관으로 건립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신안 앞바다를 우주의 고향으로 승화시킨 수화의 ‘공’(功)을 간과해선 안된다.
//문화생활부장·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