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나를 비우는 시간, 순례
바다와 숲에서 ‘사유의 여정’
2026년 03월 05일(목) 16:15
섬티아고 12사도 순례길에서 만난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난 마태오의 집.
순례는 종교의 이름으로만 완성되는 여정은 아니다.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시간에 가깝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걷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순례는 신앙이 없어도 가능하다. 길 위에서 속도를 낮추고, 마음을 비워내고, 다시 다져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순례이기 때문이다.

남도에는 그런 길이 있다. 바다 위에서 마음을 비워내는 ‘섬티아고 순례길’과 숲 안에서 자신을 다져가는 백양사 ‘참사람의 길’로 안내한다.

◇바다 위를 걷는 12㎞의 사유, 섬티아고 순례길

신안 기점·소악도에 조성된 섬티아고 순례길은 말 그대로 ‘뚜벅이 섬’이다. 지난해 5월 전까지는 배에 차량을 싣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차량 반입이 제한됐다. 압해읍 송공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 선착장으로 이동하거나 병풍도로 들어가 노둣길을 건너 대기점도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어느 방법이든 배는 타야 한다.

섬과 갯벌 사이를 잇는 노둣길 끝, 순례의 시작점이 되는 베드로의 집.
섬에 들어오면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빌려 달리거나 둘 중 하나다. 섬 안에는 자전거 대여소도 세 곳 마련돼 있다. ‘섬티아고 순례길’의 핵심은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머무는 여행이다.

길은 2017년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국내외 건축·미술 작가들이 참여해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작은 기도 공간 12곳을 조성했고, 이를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해 ‘섬티아고 순례길’을 완성했다. 2년의 준비 끝에 2019년 11월 ‘섬 여는 날’ 행사를 통해 대중에 공개됐다.

종교적 상징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공간은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건축과 풍경, 빛과 바람이 어우러진 12개의 작은 공간은 하나의 예술 프로젝트이자 사유의 장치로 읽힌다. 각각 12사도 이름을 딴 건축미술 작품들이다.

대기점도 북촌마을 동산에 자리한 안드레아의 집.
1번 베드로(건강의 집)는 순례의 시작점이다. 대기점도 대기점 선착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 외관이 인상적이다. 작지만 단정한 형태로 순례의 출발을 알린다. 2번 안드레아(생각하는 집)는 대기점도 돌산마을 노둣길 통과 후 위치한다. 동화 같은 공간으로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독특하다. 잠시 멈춰 사색하기 좋은 예배당이다.

3번 야고보(그리움의 집)는 대기점도 큰연못을 지나 솔숲 근처에 있다. 적벽돌과 기와, 나무기둥이 어우러진 안정적인 구조로, 한국적 정서가 묻어나는 공간이다. 4번 요한(생명평화의 집)은 대기점도 남쪽 바닷가 근처에 자리한다. 긴 바람창이 외부와 소통하는 형태로 시간과 빛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대기점도 남촌마을 팔각정 근처에 있는 요한의 집.
4번 예배당에는 마을 주민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올해 아흔이 된 주민이 기증한 땅 위에 세워진 공간이다. 처음에는 땅을 내놓기를 망설였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리며 결심을 바꿨다. 매일 아내를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예배당 안에서 묘가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바람대로 내부에 들어서면 벽 뒤로 작은 창처럼 뚫린 구멍이 있고, 그 너머 20m 거리에 묘가 보인다. 그는 매일 아침 그 자리에서 아내를 향한 마음의 기도를 올렸다.

5번 빌립(행복의 집)은 소기점도 소악도 노둣길 입구에 있다. 평범한 남부의 건축처럼 보이지만 곡선과 색채가 섬세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6번 바르톨로메오(감사의 집)는 소기점도 호수위에 한 송이 꽃처럼 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아 색을 만들어낸다.

소악 노둣길 입구의 빌립의 집. 프랑스 남부의 전형적인 건축형태를 띤다.
7번 토마스(인연의 집)는 소기점도 게스트하우스 뒤편에 위치한다. 언덕을 배경으로 단정한 사각형 흰색 외관이 아름답다. 별들이 내려와 박힌 듯 구슬 바닥과 푸른색 문이 인상적이다. 8번 마태오(기쁨의 집)는 소기점도 노둣길 갯벌 위에 세운 건축물로 러시아 정교회를 닮은 황금빛 양파지붕이 독특하다.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독특한 실루엣을 만든다.

뾰족지붕의 부드러운 곡선과 작고 푸른 창문이 앙증맞은 다대오(유다)의 집.
9번 작은 야고보(소원의 집)는 소악도 둑방길 끝에 자리한다. 프랑스풍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곡선 지붕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조화를 이룬다. 10번 유다(칭찬의 집)는 소악도 노둣길 삼거리에 놓여 있다. 뾰족지붕과 작고 푸른 창문이 특징이다.

11번 시몬(사랑의 집)은 소악도 진섬의 솔숲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을 안으로 받아들인 듯 시원한 작품이다. 순례길 종착지인 12번 가롯 유다(지혜의 집)는 모래 해변을 건너야 닿는 작은 섬 소악도 딴섬에 홀로 세워진 붉은 벽돌 예배당이다. 12곳을 모두 걸은 이들이 12번의 종을 울리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섬에는 ‘섬 코디네이터’가 활동하고 있다. 활동가는 5명이지만 모두 각자의 생업을 이어가면서 마을 일을 맡고 있어 실질적인 안내는 한 사람이 도맡고 있다. 섬 투어는 지도를 보며 천천히 걸어도 되고, 별도의 비용 지불 후 섬 코디네이터의 안내를 받아 차량으로 12개 예배당을 돌며 해설을 들으며 돌아볼 수도 있다. 차량 투어는 2시간 10분, 도보로 천천히 걸으면 3시간 40분가량 소요된다.

마태오의 집 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 풍경.
안내자는 단순히 위치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각 예배당에 내려 작가의 의도를 풀어주고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면 공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지까지 세세히 짚어준다. 건축과정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작가들과 호흡을 맞췄기에 가능한 해설이다. 비 종교인 방문객도 많기 때문에 설명을 할 때 일부러 종교적 색채를 앞세우지 않고 공간과 풍경, 작가의 철학을 중심에 둔다.

섬티아고 순례길은 총 12㎞. 직선이 아니라 예배당마다 들어갔다 나오는 동선이 반복되면서 거리가 채워진다. 길은 물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사리 때에는 물이 가장 많이 들고 가장 많이 빠진다. 물이 가득 차면 차량은 물론 이동이 제한되기도 한다. 첫 배가 운항하지 않는 날도 있다. 매월 음력 8일과 23일을 기점으로 이후 3일은 비교적 물에 잠기지 않아 순례하기 좋다. 방문객은 자연의 리듬에 스스로를 맞추고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섬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 가롯 유다의 집.
섬티아고 순례길은 특정 종교의 신앙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다. 어쩌면 믿음이 없어야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12개의 작은 공간은 기도실이면서 쉼터이며, 건축 작품이면서 풍경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은 누구나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섬을 떠난다.

◇숲 안에서 깨어나는 시간, 백양사 ‘장성 참사람의 길’

장성 백양사 역시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찾는 숲길이다. 종교적 의식을 위해서라기보다 잠시 조용해지기 위해 찾는다. 백양사에는 ‘참사람의 길’이 있다. 조계종 포교원이 조성한 백양사 주변 순례길이다.

얼음이 남아 있는 겨울 연못과 고요한 사찰 풍경. 숲 안으로 들어서며 순례의 분위기는 차분히 깊어진다.
‘참사람의 길’이라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소박하다. 무엇을 많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 길은 보여주기보다 비워두는 쪽에 가깝다.

숲속 트레킹이 부담된다면 아래쪽 ‘매화의 향기 순례길’만 가볍게 산책하는 것도 방법이다. 백양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고불매, 쌍계루, 천진암을 걷는 4.4㎞ 길이다.

백양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인마을 탐방로 방향으로 발을 옮기니 겨울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아 길은 밝고,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왼쪽 개울가에는 얼어 있던 겨울 물이 녹으며 조용히 흐른다.

아직은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머릿속까지 맑게 씻어내는 듯하다. 멀리 보이는 백암산 암벽은 장관이다. 겨울의 백양사를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고요한 숲 속에서는 작은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산새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개울 물소리까지. 가지들이 맞물려 터널을 이루는 구간에서는 오롯이 자연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백양사 대웅전 뒤로 보이는 백암산 암벽이 장관이다.
백양사 대웅전 뒤로는 산이 거대하게 솟아 있다. 산을 등지고 서 있다기보다 산에 기대어 숨 쉬는 듯하다. 사찰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돌탑이 종종 눈에 띈다. 누군가의 바람이, 누군가의 소원이 작은 돌 위에 얹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양사 고불매는 매년 3월 진분홍빛 꽃을 피우는 매화다. 1947년에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한 의미로 ‘고불매’라는 이름이 부여됐으며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백양사 참사람의 길.
천진암으로 오르는 길은 약간 가파르다. 평지에서 흐르던 생각이 오르막에서는 또렷해진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오는 길에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백양사 순례길은 사찰이지만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숲과 바람, 물과 돌을 느끼며 스스로를 다져가며 걷기만 해도 좋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이 고요해지는 순간이면 충분하다.

/글=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img.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img.kwangju.co.kr/article.php?aid=1772694900796290295
프린트 시간 : 2026년 03월 05일 21:3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