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년 전의 ‘한글 스펙’, 훈민정음 해례본 - 조운찬 문화 칼럼니스트
2026년 03월 03일(화) 00:20
지난 1월로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창비)이 창간 60주년을 맞았다. 이중섭 화가 탄생 110주년을 맞아 특별전 ‘쓰다, 이중섭’도 열리고 있다. 2026년은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간행 100주년이기도 하다. 또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이고 시인 박인환은 탄생 100주년이면서 서거 70주년이다.

10년 또는 100년 단위로 떨어지는 연도를 우리는 ‘꺾어진 해’라고 부르고 북에서는 ‘정주년’이라고 한다. 이런 해가 되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특별하게 여겨 여러 행사가 열리곤 한다. 십진법에 익숙해 10년을 단위로 기억하는 게 편해서일까. 어쩌면 매년 기념하기 어려워 10년 또는 100년 주기로 몰아서 성대하게 기억하자는 뜻도 있을 것이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 그리고 주시경 선생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한글의 해’라 부를 만하다. 이에 맞춰 정부는 광화문에 한글 현판 추가 설치라는 의제를 내놓았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직후 122일 동안 머물렀던 청주에서는 ‘훈민정음 특별시’를 만들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케데헌’ 열풍과 국립중앙박물관 관객 650만 명 돌파에서 보듯 외국인의 한국 문화와 한글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한글은 창제자, 만든 과정과 시점, 그리고 문자 사용설명서를 갖고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다. 일각에서는 한글을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동 작품으로 보기도 하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창제한 글자다.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서문에서 밝힌 ‘세종 친제’는 임금에게 공을 돌리는 의례적 표현이 아닌 분명한 팩트다. 집현전 학사들은 문자 창제가 아닌 사용 설명서격인 ‘해례(解例)’ 작업에 동참했을 뿐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해례본)에는 제자 원리, 사용법과 함께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분명하게 나와 있다.

국경일인 한글날(10월 9일)은 창제일이 아닌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종은 1443년 음력 12월 한글을 창제한 뒤 곧바로 언문청을 세우고 중국의 운서인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다. 또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을 짓게 하며 한글의 성능을 다각도로 시험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3년이 흐른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해례본)을 간행하며 새 문자의 창제를 세상에 알렸다. 1997년 ‘훈민정음’(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로부터 한글의 과학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았다. 2014년에는 국립한글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도 편하여 우리말을 글로 표현하는 데 최적의 문자다. 오죽하면 정조 임금이 한문으로 편지를 쓰다가 ‘뒤ㅤㅈㅠㄱ박ㅤㅈㅠㄱ’이라는 한글 어휘를 적어 넣었을까? 이 말에 적절한 한자 어휘를 찾아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이 뛰어난 점은 문자 창제 원리와 함께 운용 방법을 담은 ‘한글 사용 설명서’를 덧붙였다는 사실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쓴 서문과 예의(例義), 그리고 학사들이 쓴 해례로 구성된다. 우리는 중고교 시절 ‘나랏말싸미~’로 시작하는 서문과 28자 운용법인 ‘예의’ 정도만 배웠을 뿐이다. ‘해례’는 글이 길고 어려워 아무도 들추지 않았다. ‘해례’는 한글이라는 신상품의 사용법을 설명한 ‘스펙’이다. 한글이 어떤 원리로 소리를 내고 조합되는지 상세히 담고 있다.

다행히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 대중해설서가 여러 종 나와 있어 누구나 쉽게 훈민정음 전체를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해례본’ 안에 창제 당시 쓰인 한글 어휘가 124개나 실려 있다는 점이다. 특히 벼, 별, 감, 잣, 손, 버들, 노루, 사슴처럼 백성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어휘를 골라 예시로 들었다. 이처럼 ‘해례’라는 훈민정음의 차가운 스펙에도 “사람들이 쉽게 익혀 편하게 쓰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따뜻한 애민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반포 580돌을 맞아 우리가 ‘훈민정음’(해례본)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한글의 기원과 원리를 가장 정교하게 설명한 ‘한글 스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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