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매향(埋香)으로 피어나다 - 이중섭 소설가
2026년 01월 12일(월) 00:20
지난해 12월부터 가게 폐업 정리에 들어갔다, 한 달 정도 할인행사를 하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조금 더 늘어났다. 새해부터 새로운 첫발을 디디려던 생각은 단지 희망 사항이 되었다. 처음 세일을 시작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대상포진.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무시했더니 어느 날 사라졌다. 연이어 귀가 윙윙거렸다. 이명인가 싶었지만,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지나자 괜찮아졌다. 내 몸과 다르게 마음이 자신들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고 스스로 도망쳤다. 사실 가게 일 외에도 청탁받은 원고가 세 군데나 있어 아플 여유가 없었다.

가게 정리로 한창 바쁠 때 시골 여자 동창들이 찾아왔다. 점심을 먹다 내 얘기가 나와 들렀다고 했다. 한 친구는 낮술을 한잔했는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이들은 환갑 넘은 아줌마들이라 콸콸하고 시원해 남자 친구들보다 편했다. 물건을 대충 사더니 금액을 모바일로 이체했다. 나중에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이 나이에 가게를 폐업하는 것을 걱정한 마음 씀씀이였다.

이 친구들 말고도 여러 시골 친구가 도움을 주었다. 꼭 골치 아파할 만한 물건들을 사 갔다. 이곳 수험생들이 필요치 않은 물건들, 예전에는 유행했는데 세월 앞에 무너져 묵혀 있던 물건들을 용케도 알고 챙겨갔다. 그들이 다녀가면 좁았던 가게가 훤하게 넓어졌다. 꼭 흐름이 빠듯하다 싶을 때 나타나 한 번씩 물건을 훑어갔다.

처음 가게를 정리할 생각을 하자 오랫동안 방치해 놓아 거의 중고품이 된 물건들이 주르륵 스크린처럼 흘러갔다. 한때는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수험생들이 선호했던 만년필과 고급 펜들, 비싼 샤프와 원목으로 된 고급형 독서대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해결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풀렸다.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인행사를 하니 하나둘 입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특히 만년필에 그런 애호가들이 많았다.

한 달 동안 가게 정리를 하다 보니 마치 어릴 적 시골에서 ‘둠벙’을 푸던 일과 흡사했다. 둠벙은 갈수기에 논에 물을 대던 용도로 만들어 놓은 웅덩이다. 물을 퍼내는 것은 한마디로 웅덩이를 청소하는 일이다. 쌓인 흙더미나 쓰레기를 걷어내어 물 저장량을 확보하려는 이유였다. 양수기로 물을 푸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개구리와 뱀들이 기어 나와 논 속으로 달아났다. 계속 물을 푸다 보면 벽면의 돌 틈에 숨어 있던 물고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흐린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무슨 물고기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결국 맨 마지막에는 길고 굵은 장어가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바닥에 오래 쌓인 진흙을 걷어내면 청소는 끝났다.

둠벙 청소 정도로 생각했던 가게 정리가 시간이 갈수록 커다란 보(洑)를 청소하는 것처럼 바뀌었다. 지금까지 평수가 작고 오래 익숙하다 보니 좁다고 착각했었다. 오래된 진흙 펄 같은 먼지 속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 책장 맨 아래 칸이나 손이 닿지 않은 사각지대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는 것들이 영락없이 오래된 물고기를 생각나게 했다. 물이 빠지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흘러나오던, 시커멓고 커다란 요물들. 의외로 이런 것들이 봇물을 썩지 않게 지탱하지 않았나 싶었다. 마치 오랜 진흙 펄 속에서 묻혔던 나무가 부처상으로 환생하듯, 매향(埋香)이 되어 연꽃 향기로 날리듯.

다녀간 여자 동창 중 한 명은 어릴 때 또래들보다 조숙했다. 조숙하면 남자아이들이 따랐다. 나이 들어 그런 얘기를 하며 깔깔거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여자 친구가 마지막에 했던 한마디가 아직 목소리로 맴돌았다.

“일찍 까지거나 늦게 까지거나, 언젠가 한 번, 까지는 것은 마찬가지야!“

돌이켜 보면 향기로운 어린 시절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그 향기는 흩어지지 않는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아이들이 등하굣길에 걷던 송냇가 둑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길에서 겨울바람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그 길에서 풋사랑에 애달파 눈물을 지었다. 그 길에서 달뜬 마음을 한껏 노래했다. 그때의 목소리가 송내를 타고 신선바위를 넘어 멀리 천등산 정상 바위에 부딪혀 메아리로 울리곤 했다. 모든 추억은 냇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이제 다음 주면 가게 폐업 정리가 끝난다. 이 가게라는 공간에서 어릴 적 기억을 추억했듯이 가게에서의 지난 추억들이 이야기로 빛날 것을 믿는다. 그 많던 색상의 제품들이 기억의 장면을 분명 화려한 이야기로 출렁이게 만들 터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바위에 각인하듯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이 희망으로 기다리고 있다. 공간이 없어져도 기억은 추억이란 에너지로 보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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