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도의 감정
권라율
2026년 01월 01일(목) 16:00
/클립아트코리아
여름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해요



김정 씨랬죠? 김정 씨, 생각은 파도를 타죠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몇 달 아니 몇 년 끙끙 밀린 연차가

달려가는 달력이 달달 시계가 흘낏

소금사막이나 빙하는 진작 품절이고

영어도 못 하고 할랄 음식도 모르면서



그저 구를 만큼 구르고 싶어서

파도와 한 몸으로 조는 붉은가슴도요

생각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만국기 휘날리는 유람선 갑판 뒤에 올라탄

먼지 낀 동네 버스처럼

차창 가까이 날아드는 불빛에

이물감으로 흔들려요



홍학의 부리나 들소 뿔의 파편

흰 산봉우리를 기어가는 설표의 꼬리뼈

가끔 캐리어 속 번뜩이는 칼날들

깊숙이 넣어둔 조약돌 몇 개



퇴근길 당신은

뜨거운 낮에 든 서늘한 목덜미에 화들짝

밤낮이 서로 먼 날이네

당신은 턱까지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우며

허리 버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구겨진 잠은 주말로 접어두고

맥주 한 캔에 다시 펼쳐 보자 할 때



돌돌 툴툴 구르며 어느 선창가

후미진 호텔로 들어가는 캐리어 하나

아무 방이나 주세요

당신은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오줌내 나는 바닥으로 앉아

비로소 캐리어를 열어보려는데

수천수만 킬로미터밖에서도

꾹 다문 입술의 여권과 꾹꾹 따라온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



오로라를 보러 갈 걸 그랬지?

오로라에는 여름 감정이 없다는 듯

딴전을 피우는 김정 씨

극야의 눈동자는 별의 미간만큼이나 멀어서



신은 목덜미에서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린대요

하늘이 맥없이 툭, 떨어지면

느린 목 근육을 키워야지

벽을 가로지르는 바퀴벌레의 다리 힘처럼



성경이나 코란 불경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김정 씨, 소뇌 대뇌에도

운동장이 있어 지퍼를 열면 빛과 구름 바람이

우르르 쏟아진다더군요?

하늘만 한 운동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를 줄곧

온 우주가 달려온 거라면요?

먼지 날리듯

홍학 부리가 차창에 부딪히듯

설표가 당신이 돌진해가는 거라면요?

캐리어 속에서요 무한한



김정 씨, 돌아서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

세 시에는 세 시의 눈동자가

다섯 시에는 다섯 시의 눈동자가

성운 사이 흩날리면서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img.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img.kwangju.co.kr/article.php?aid=1767250800793902026
프린트 시간 : 2026년 01월 01일 19: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