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블랙리스트 판사, 전업 작가 되다
나로 살 결심-문유석 지음
2025년 12월 25일(목) 18:55
배우 정경호 주연의 tvN 드라마 ‘프로보노’는 속물 판사가 사고를 친 후 본의 아니게 공익변호사가 돼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다. 가까운 미래, 전국민이 참여하는 법정쇼가 등장하는 ‘악마 판사’, 고아라 주연의 ‘미스 함무라비’ 역시 화제를 모은 법정물이다. 세 편의 법정 드라마를 쓴 주인공은 전직 판사 출신 문유석 작가. 정년까지 판사로 일하는 게 인생 목표였던 그는 지난 2020년 법복을 벗고 전업 작가가 됐다.

이미 ‘개인주의자 선언’, ‘최소한의 선의’, ‘쾌락 독서’ 등의 저서를 통해 만만치 않은 글 실력을 보여온 문유석 작가가 전업작가라는 ‘두 번째 삶’을 담은 에세이 ‘나로 살 결심’을 펴냈다. “남들의 기대, 시선, 평가가 어떻든 내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 욕망, 행복을 좇아 살자고 마음 먹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판사라는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작된 ‘두 번째 선택’은 시행착오와 고민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23년간 판사로 재직했던 문유석 작가가 대본을 쓴 tvN 드라마 ‘프로보노’ <tvN 제공>
삶의 대전환을 앞두고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려고 애썼던 저자는 23년간 판사로 살았던 ‘첫 번째 삶’부터 써내려간다. 그는 자신을 법원 ‘안에서’ 바꿔보려했던 ‘나이브한 이상주의’였다고 말한다. “자기 일에 성실한 엘리트집단의 자정 능력을 신뢰했고, 시스템을 신뢰했고, 한국사회의 변화 방향을 신뢰했”지만 “사법부는 법의 논리 대신 힘의 논리, 정치의 논리가 작동하는 장”이었다. 사법부의 원칙은 힘 앞에 무력했으며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는 하나’라는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글 쓰는 판사’로 정년을 맞고 싶었던 저자는 세월호 관련 기고가 원인이 돼 양승태 사법부가 작성한 판사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고, 이른바 ‘사법농단’을 접하며 법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저자는 새로운 삶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생전 없던 불면증과 심장 두근거림 현상,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 반강제로 체득되는 겸손함, 내 코가 석자라 생기는 세상일에 대한 무관심, 유튜브 중독, 독서불감증….’ 저자가 전업작가 생활 5년 동안 얻은 것들이다. 스스로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듯한 슬럼프를 여러번 겪은 저자는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좋은 재판이란 무엇인가’ 고민했던 저자는 이제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힘겹게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장소가 바로 법정이기에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정드라마를 통해 ‘정의’를 찾아보려한다. “밤마다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끝도 없이 밀려오는 개인파산 사건 기록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읽고 고민하던 동료, 작은 벌금 사건 피고인의 하소연을 미련하리 만큼 귀기울여 듣고 억울함이 없도록 재판하려하던 동료”를 기억하는 그는 “자기 일에 애정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타고난 영웅보다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인 현실적인 인간을 좋아”하기에 그런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여러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하려”한다.

그는 “거창한 이념도 집단도 아닌, 서로의 경계를 존중할 줄 아는 합리적인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가 세상을 실질적으로 낫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문학동네·1만75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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