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마라톤, 괜찮지 않습니다 - 강정희 전 중학교 교사·소설가
2025년 12월 02일(화) 00:20
“뭐라고? 독서-마라톤? 책을 읽으면서 달리기를 한다고?”

“아니, 그게 아니고….”

여러 기관에서 야심차게 운영하는 독서 캠페인 이름이 그렇단다. 세상에. 마라톤은 폐활량이 크고(많고) 허벅지에 울룩불룩 근육을 가진 선수들이 몇 달씩 단련하고 출전하여 기록을 재고 순위를 겨루는 대회가 아닌가.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비유는 익숙한데, 마라톤이라…. 그래, 길게 오래 많이 읽자는 뜻이렷다. 그러면 어순을 바꾸어 마라톤독서라고 해야 하지 않나. 아무튼, 운동에 흥미가 없고 체력도 좋은 편이 아닌 나는 듣기만 해도 숨이 차고, 둔한 두 다리가 노곤해진다.

여러 학교에서 운영하는 독서마라톤에서는 책 1쪽이 1m란다. 학년 초 코스별 목표를 정하고 읽은 쪽수와 소감을 해당 홈페이지에 규정대로 기록하여, 연말에 심사를 통과하면 완주증을 받는단다. 11월 이즈음은 행사가 마무리되는 시기다. 곧 학교별 학급별로 통계와 순위가 공개된다. 교실 분위기는 어떨까. 책을 읽다가 여백이 있는 면이 나오면 감탄사를 외치는 아이가 있단다. ‘앗싸, 오예!’라고. 글이 적어도 1쪽은 똑같이 1m이기에. 자, 이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내면화되는 가치는 무엇일까.

시간 날짜 전화번호 돈, 모두 십진 숫자로 표시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치로 정량화할 수 없는 것도 많다. 독서왕이라는 이름으로 다독상을 주면 아이들은 권수를 늘리기 위해 두께가 얇고 그림이 많은 책을 고른다. 물론 도서실에서 여러 권 대출한 후 읽지 않고 반납하면 자동으로 다독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상의 명칭을 바꾸어 ‘다대출상’이 생기기도 했다. 아, 상이란 무엇인가?

도서 몇 권을 정해 퀴즈대회나 골든벨을 하면 아이들은 문제로 나올 법한, 단편적 지엽적인 것을 찾아 메모하여 외운다. 독후감 대회를 하면 인터넷을 뒤져 글을 완성해 온다. 물론 상에 욕심이 있는 일부 아이들이 그렇다. 욕심이 없는 일부 아이들은 포기하고 외면한다. 책에서 점점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칭찬, 인정, 수상, 보상 등이 행동의 동기가 될 때 숭고한 취지는 사라지고 공허한 껍데기만 남는다. 미터로 환산된 쪽수와 권수, 지정된 글자 수의 소감으로 완주를 심사받는 과정을 염려한다. 한편 도서실 학부모 자원봉사자는 학교평가를 위해 바코드 리더기로 학생의 도서 대출 반납 건수를 부풀리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어떤 책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자신의 세계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아는 과정이 배움이고 성장일 터이다. 부모와 교사와 사회가 펼쳐주는 대로 흡수하고 수용하는 유소년기는 밀도와 비중이 높은 시기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미래사회에서 책과 꽃에 대해 언급한 유아 조기교육 장면은 섬찟하다.

인간은 여건만 되면 책읽기를 즐기는 존재이다. 다정하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몸과 맘에 영양소가 되는 책을 손 닿는 곳 가까이 놓아주고, 시간을 주면 된다. 부모와 교사와 사회가 책을 읽고 대화하면 완주증이나 다독상 같은 건 없어도 아이들이 책을 읽을 것이다. 관리 감독 심사 평가 재촉을 당하는 학교는 슬프다.

“선생님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과제를 주면 꼭 이렇게 묻는 아이가 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응, 안 해도 괜찮아. 꼭 해야 하는 것은 숨쉬기 밥 먹기 잠자기 정도이고, 독서 공부 이런 건 안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그런데 그걸 하면 그만큼 좋은 거야. 그러니 네가 판단해.”

‘필독 도서’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세상에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을까, 읽으면 좋은 책이 있을 뿐. 그래서 이렇게 안내한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어라. 어렵고 재미없어도 꾹 참고 열 장을 읽어라. 열 장을 읽었는데 계속 어렵고 지루하면, 다른 책을 찾아라. 그 책은 지금의 네게 맞지 않을 뿐, 책에도 네게도 잘못은 없다.’

독후감은 절대 쓰지 않는다. 꼭 쓰고 싶으면 선생님 몰래 쓴다. 친구에게 권하고 싶으면 국어 수업 책 소개, 책 대화 시간에 알려준다. 책과 어울리는 것들이 많다. 단단한 의자와 탁자, 푹신한 방석과 무릎담요와 등 쿠션, 노트와 펜과 색색의 포스트잇, 머그잔에 담은 차, 그리고 꽃병과 허브 화분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책만 있으면 된다. 병원과 미용실과 버스 정류장과 기차역과 공항은 책 읽기에 좋은 곳이다.

밥과 물과 집과 옷에 책을 더하자. ‘의식주서’다. 행사 운동 캠페인 말고, 마음에 스미는 책읽기를 꿈꾼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img.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img.kwangju.co.kr/article.php?aid=1764602400792679131
프린트 시간 : 2025년 12월 02일 0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