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공장의 대변신…미디어아트 성지가 되다
[복합문화공간, 도시의 미래가 되다] (13) 칼스루헤 ZKM
탄약공장→제철소…도시 흉물로 20년 방치
철거 위기 딛고 리모델링 프로젝트 통해 부활
20~21세기 미디어아트 1만2000여점 소장
500m 길이에 전시실·박물관·카페 등 다채
‘한국작가 김성환’ 등 매년 굵직한 특별기획전
2025년 11월 26일(수) 09:00
고풍스런 외관과 달리 거친 느낌의 ZKM 내부는 1층 로비를 중심으로 양쪽에 대형 전시실이 자리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퐁피두센터. 아레스 일렉트로니카, ZKM….

세계적으로 유명한 복합문화공간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 25일로 개관 10주년을 맞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첫삽을 뜬 ACC가 초기 랜드마크와 콘텐츠를 둘러싼 논란으로 거센 비판을 받자 지역 문화계에서 벤치마킹 모델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ZKM은 가장 많이 거론됐던 곳이다. 그즈음 ‘칼스루헤(Karlsruhe)라는 지명은 몰라도 ZKM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핫했다. 독일의 수많은 소도시 가운데 ‘미디어아트의 발신지’라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통해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열차(ICE)를 타고 1시간 30분쯤 달리면 칼스루헤 중앙역에 닿는다.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뷔르템베르크주에 속하는 인구 30만 명의 중소도시다. 베를린, 뮌헨 등 대도시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관광명소가 거의 없어서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1989년 ‘ZKM(Zentrum fur Kunst und Medien·예술과 미디어센터)’이 개관하면서부터다. 오스트리아 린츠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센터와 함께 ‘미디어아트의 성지’로 부상하며 매년 전 세계에서 28만여 명이 다녀가는 문화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5년부터 ‘슐로스리히트슈피레’(Schlosslichtspiele·궁전 라이트쇼)가 열리는 가을 시즌에는 칼스루헤행 기차가 매진이 될 정도다.

1만 2000여 점의 방대한 컬렉션을 지닌 ZKM은 층고가 높은 건물의 특성을 살려 스펙터클한 기획전을 개최한다
지난 9월 초, 기자가 찾은 ZKM은 독특한 조합의 외관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5층 규모의 고풍스런 건물과 전면이 유리로 마감된 모던한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글로벌 미디어 축제의 산실과 거리가 먼 고풍스런 분위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는 ZKM의 장소성과 관련이 있다. 100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ZKM은 본래 1·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탄약과 화약 등을 제조하던 탄약공장이었다. 종전과 동시에 건물의 용도가 사라지자 칼스루헤시는 이 곳을 제철소로 리모델링해 가동했다. 하지만 1980년 대 초 공장이 멈춘 후 20년간 방치되는 바람에 도시의 흉물로 전락했다. 급기야 ‘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도 했지만 당시 독일 정부가 정책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건물들에 한해 보존하기로 하면서 가까스로 살아 남게 됐다.

이후 1986년 칼스루헤시와 학계·시민들은 ZKM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미디어아트센터로 부활시켰다. ZKM이 개관하면서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미디어아트, 음악, 건축과 관련된 시설들이 집중됐고 시의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꾸준히 업데이트 하는 등 역량을 축적시켰다.

ZKM의 진가는 내부에서 빛을 발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해질 만큼 반전이 펼쳐진다. 미술관 특유의 고급스럽고 화려한 인테리어 대신 거친 느낌의 철제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상 5층, 길이 500m, 폭 100m 공간에는 대규모 전시실, 미디어 박물관, 음향연구소, 헤르츠 연구실, 랩, 극장,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마침, 방문했던 날은 평일 오후인데도 1층 한켠에 자리한 카페에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전시장에도 유독 20대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인근에 위치한 칼스루헤 국립 디자인·조형예술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미디어아트 계열 학생을 주로 뽑는 이 대학은 일부 건물이 ZKM과 연결돼 있어 전시장에서 이동 수업을 하거나 대형 전시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관람객들로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전.
1층 로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잡은 대형 전시실에는 세계적인 퀄리티를 자랑하는 ZKM 소장품 상설전 ‘끝나지 않은 이야기’(The Story That Never Ends)가 열리고 있었다. 뉴욕의 모마(MoMA),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에서나 만날 수 있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미디어아트 대표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ZKM이 소장하고 있는 20~21세기의 미디어아트 1만2000점은 전 세계의 미술관들이 러브콜을 보낼 만큼 독보적이다. 특히 ZKM은 풍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올해 7개의 굵직한 기획전을 잇따라 내놓아 국제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관람객들이 ZKM의 상설전을 둘러보고 있다.
한국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 김성환 전시를 비롯해 ‘끝나지 않은 이야기’ 등 세계미디어아트의 변천사를 조명한 전시에서부터 미디어아트의 라이징스타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KIT 200주년 특별전’은 지난 1825년 개교한 칼스루헤 공과대학(Karlsruhe Institute of Technology) 설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과학과 기술교육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KIT가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했는지 되돌아 보는 뜻깊은 기회다. 수소엔진버스, 로봇, 램프, 19세기 실험기구세트, 방사선계측기 등 사회·정치적 변곡기에 등장했던 100개의 오브제가 전시돼 주목을 받았다.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의 발신지인 ZKM 야경 모습. 탄약공장이었던 건물에 들어선 ZKM은 지난 1989년 모던한 디자인의 건물을 증축해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과 미디어센터로 개관했다. <사진=ZKM 제공>
1만여 점이 넘는 비디오 관련 자료와 서적 등을 소장하고 있는 미디어 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개관 초창기부터 시각적인 기술과 아트 뿐 아니라 음악 등 사운드 관련 연구·개발·작품 제작에 관심을 가져온 ZKM의 음향 연구소 역시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과 지역작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작곡, 녹음, 기술 개발 등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ZKM의 또 다른 핵심시설인 헤르츠 랩은 미디어 아트, 과학, 사회 분야의 결합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예술작품 창제작과 미디어 테크놀로지 연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AR, VR, 인공 지능 등 현대예술과 결합된 다양한 과학 기술 개발을 위해 많은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ZKM의 홍보 매니저 세바스티안 클레인(Sebastian Klein)은 “ZKM은 개관 30주년인 지난 2019년 칼스루헤가 독일 최초의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에 선정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였다”면서 “본연의 전시, 연구, 보존 기능을 통해 미디어아트와 디지털세계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지 탐구하는 미디어아트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칼스루헤=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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