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판도라는 없는 세상
2025년 11월 06일(목) 00:20
시간도 거리도 아득한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폴레옹이 이겨 프로이센을 장악하면서 천년 가까이, 때로는 유명무실하게 이어져 오던 신성로마제국이 붕괴되었다. 전장에 인접한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가 입은 피해는 컸다. 이 난세의 혼돈 속에서 1807년과 1808년 두차례에 걸쳐 괴테의 드라마 ‘판도라’는 집필되는데 1막만 쓰이고 미완성에 그쳤다.

드라마 ‘판도라’는 제목이 판도라인데, 판도라가 등장하지 않는다. 판도라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우 고전적인 언어와 형식에 담고 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이미 떠나버린 아내로 남은 사람들의 대화에서만 언급된다. 그로 인해 작품 전반에 두드러지는 것은 무언가를 잃고 없이 지내는 고통스러운 감정이고, 작품의 중심은 ‘판도라’가 아니라 판도라가 돌아오리라는 ‘기대’가 된다. 현대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오지도 않지만 그래도 기다린다고는 한다. 있다가 떠나버렸다는 판도라에는 “기다리며”라는 술어조차 없다. 판도라는 그냥 더 이상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고전적인 작품임에도, 극렬하게 현대적이다.

언어와 형식이 고전적이고, 주요 인물들도 신화에서 취했으나, 괴테는 많은 변형을 가했다.아내를 잃은 에피메테우스와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그대로 등장한다. 성년이 되었어도 아직 자신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한 어린 백성들인 그 자녀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신화 속 판도라는 ‘모든 선물/재능을 받은’여인이지만, 괴테는 모든 것을 ‘주는’ 여인에다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비밀에 찬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것은 ‘재앙’이 아니라, 인간이 허겁지겁 뒤쫓는 ‘공중의 상’, 즉 ‘허상’이다.

또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에게 괴테는 ‘엘포레 <희망>’과 ‘에피멜레이아 <근심>’이라는 두 딸을 만들어 준다. 엘포레는 판도라가 데리고 떠났으나 가끔씩 모습이 붙잡히지 않는 채로 아버지를 찾아오고, 에피멜레이아는 아버지 곁에 머문다.

신화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프로메테우스-에피메테우스의 대립되는 성격, 또 그들로 대변되는 부모 세대와 신화에는 없는 그 자식들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의 차이도 보이고, 그 밖에도 양치기와 어부 군상처럼 다양한 기본적 삶의 형식들도 대비된다.

한편, ‘나중에 생각하는 자’ 에피메테우스와 ‘먼저 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나 서구에서의 오랜 해석에서나 서로 대립적이다. 각기 ‘성찰적인삶(vita contemplativa)’과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을 구현하는 인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테에게서 둘의 대립은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세계는 대장장이들, 전사들의 세계로 확대되어 있고, 반면 에피메테우스의 세계는 양치기들의 세계이며, 예술이 시작되는 지점도 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 추종자들, 즉 힘 있는 사람들이 판도라를 통해서 힘을 잃고 행동을 잃는다고 한다. 힘 있던 사람들이 포도주 짜는 이가 되고 물고기 잡는 이가 되고 양치기가 된다. 아름다움, 평온, 경건, 안식일 같은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다양한 인간 현존 형식이 다양한 해석, 그리고 다양한 형식에까지 담겨 있다.

성찰과 행동이든, 이상과 현실이든, 대립적인 세계관이든,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 심히 어긋나는 삶의 형식, 그 양극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닥치는 위험은 괴테에게도 주요 테마의 하나였으며, 독자는 궁극적으로 이 두 영역을 제대로 합치기를 권유 받는 느낌일 뿐, ‘어떻게’는 마냥 분명하지 않다. (작품도 미완성이다.) 어쩌다 다가와 어렴풋이 떠도는 희망이 있을 뿐, 늘 곁에 있는 건 근심이다.

이 극단이 유기적으로 합쳐지는 과정을 괴테는 양극의 상승이라 했고, 괴테를 잘 읽은 헤겔은 정·반 다음의 ‘합(合)’이라고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양 극단이 어쩌면 세상의 본 모습이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든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부터 수천 년이 흘러도 여전히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고 자꾸 그런 얘기를 하게된다는 건 그래도, 그 분열과 위험을 눈안에 담고(외면하지 않고), 그 가운데 어딘가에서 중심을 잡으며 어떻게든 파국은 막아가며 살아 보겠다는 뜻일 게다, 판도라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세상에서.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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