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서민의 감성과 검박한 쓰임의 미학, 고흥분청사기
![]() 분청사기 전시실과 분청문화공원, 한옥 공방, 야영장까지 어우러진 복합공간인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야외 공원. /최현배 기자 |
“손을 넣고 한 번 만져보세요.” 해설사의 권유에 따라 상자 안에 손을 넣자 조각난 분청사기 파편이 손끝에 만져진다. 의외로 거칠지 않고 손에 닿았을 때 촉촉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독특한 부드러움이랄까. 흰 분장이 덧입혀진 조각은 여전히 빛을 머금은 듯 은은했다. 수백 년 전 고흥 운대리 가마터에서 흙과 불로 빚어진 생활의 그릇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다.
파편 하나로 시작된 분청사기에 대한 호기심은 국내 최대 규모의 분청사기 요지가 발굴된 사적 제519호 운대리 가마터 위에 세워진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해결됐다. 1980년 첫 발굴을 시작으로 37년간 이어진 조사 끝에 2017년 개관한 박물관은 고흥의 유구한 역사를 기록·보존하고, 분청 도자의 문화와 고흥 설화를 함께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
6만 평 규모의 부지에 본관 전시실, 야외 분청문화공원, 한옥 공방과 체험장, 야영장까지 어우러진 복합 공간으로 도자기와 문학, 설화를 엮어낸 박물관은 고흥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분청은 고려청자의 뒤를 잇는 도자기다. 강진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청자는 주로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조선 건국 이후 검박한 미학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흐름 속에서 도공들이 자유롭게 제작한 생활 자기로 분청이 자리잡았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고려의 화려함을 경계하고 절제된 성리학적 미학을 추구했다. 청자가 사치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분청은 검소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기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 왕실의 의복에서조차 무늬를 없앤 것처럼 조선의 미학은 화려함을 덜어내고 억제된 선 안에서 빛을 찾았다.
특히 태종 이방원 대에는 궁중에서 청자를 쓰던 관습을 바꾸어 왕명으로 백자를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대량 생산 체제가 마련되지 않아 백자를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고, 이는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왕실과 관청에서까지 백자를 써야 했던 조선 초기에 도공들은 흰 흙을 발라 백자처럼 보이게 하는 ‘덤벙 기법’을 고안해냈다. 언뜻 보면 백자와 다르지 않은 이 그릇은 사실 백자의 대용품이었고, 당시 일반인들에게 널리 쓰였다.
이후 우리 땅에서 고령토가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백자시대로 전환되기 전까지 덤벙 기법은 조선 도자기의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진흙으로 빚은 그릇 위에 흰 흙을 분장하듯 바르고, 그 위에 다양한 기법을 더해 구워낸 분청은 백자의 대체품이자 새로운 미감을 가진 도자기였다.
분청사기는 상감, 인화, 박지, 조화, 철화, 귀얄, 덤벙(담금) 등 7가지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왔다. 우리나라 분청사기의 대표적인 기법인 덤벙은 말 그대로 그릇을 백토물에 ‘덤벙’ 담가 백자의 얼굴을 얻게 했고 인화 기법은 도장을 꾹꾹 눌러 무늬를 반복했다.
철화는 붉은 흙물을 붓에 적셔 자유롭게 그린 무늬가 검은 선으로 변해 남았는데 당시 분청사기는 화공이 아닌 도공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 무늬를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귀한 도자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한 도자기’로 불린다.
운대리에는 무려 27기의 분청 가마터와 5기의 청자 가마터가 분포한다. 박물관 전시실 한쪽에는 발굴된 가마터가 축소 복원돼 있고 깨진 파편들이 주병이나 사발의 형태를 짐작케 한다. 세종과 태종 시절에도 불길이 이어졌던 가마는 좁고 긴 구조 속에 수백 개의 그릇을 태워냈지만 온전히 남는 것은 20~3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불량품으로 깨뜨려 버려졌고, 그 파편들이 오늘날 층층이 쌓여 출토된다.
운대리에 수십 기의 가마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고흥의 흙 덕분이었다. 현대 연구에서도 확인되듯 이 지역의 태토는 곱고 분장이 잘 먹어 다양한 기법 실험에 적합했다. 여기에 맑은 물과 풍부한 땔감, 바닷길을 통한 유통 조건까지 더해져 고흥은 분청사기 생산지로서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분청의 독창적인 미감은 결국 이 땅의 흙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어렸을 적 멀쩡한 그릇을 서로 부딪혀 깨뜨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역 어르신의 회고는 파편을 단순한 유물이 아닌 일상의 풍경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박물관의 본관은 지상 3층 규모로 역사문화실, 분청사기실, 설화문학실 등 다섯 개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역사문화실에는 고흥의 선사부터 근현대까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고인돌 밀집 지역으로 유명한 고흥은 세계 최초로 비파형 동검이 운대리에서 발견되며 고고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불교 문화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군의 활약, 나로우주센터 개관까지 고흥의 시간은 도자기와 함께 이곳에 겹겹이 전시돼 있다.
분청사기실은 박물관의 핵심 공간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이관된 귀한 유물과 함께 발굴 현장의 파편, 불량품까지 나란히 배치해 ‘완제품’과 ‘깨진 그릇’이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학이 날개를 펼친 무늬가 새겨진 분청 매병은 손상만 없었다면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귀하다. 깨진 발과 사발 파편은 불길 속에서 실패한 흔적이지만 그 안에서도 장인의 손길과 기술의 단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시실에는 관람객이 직접 파편을 만져볼 수 있는 체험코너도 마련돼 있어, 분청을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손끝의 기억으로 남게 한다.
설화문학실에서는 고흥 지역의 대표 설화 30여 편이 인터렉티브 미디어로 구현돼 관람객의 눈길을 붙든다. 단순히 전시 패널을 읽는 것을 넘어 설화 속 장면을 직접 체험하는 오감 콘텐츠는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다. 분청문화공원으로 나가면 분청사기와 설화를 형상화한 조형물, 작은 동물원과 놀이터, 피크닉 공간이 이어져 있어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하루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고 전시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한옥 공방에서는 국내외 레지던시 작가들이 머물며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고 일반 관람객은 물레 체험을 통해 분청 그릇을 직접 빚어볼 수 있다.
매년 열리는 전국 분청사기 공모전은 올해로 8회를 맞았으며, 전통 기법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작가는 3D 프린터를 활용해 분청 토템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는 유화처럼 보이는 두꺼운 분장을 도자기 위에 올려 독창적인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글=이보람·주각중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 고흥분청문화박물관 명품실의 분청사기 작품. /최현배 기자 |
조선은 건국과 함께 고려의 화려함을 경계하고 절제된 성리학적 미학을 추구했다. 청자가 사치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분청은 검소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기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 왕실의 의복에서조차 무늬를 없앤 것처럼 조선의 미학은 화려함을 덜어내고 억제된 선 안에서 빛을 찾았다.
![]() 과거 분청사기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재현한 모습. /최현배 기자 |
이후 우리 땅에서 고령토가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백자시대로 전환되기 전까지 덤벙 기법은 조선 도자기의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진흙으로 빚은 그릇 위에 흰 흙을 분장하듯 바르고, 그 위에 다양한 기법을 더해 구워낸 분청은 백자의 대체품이자 새로운 미감을 가진 도자기였다.
분청사기는 상감, 인화, 박지, 조화, 철화, 귀얄, 덤벙(담금) 등 7가지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왔다. 우리나라 분청사기의 대표적인 기법인 덤벙은 말 그대로 그릇을 백토물에 ‘덤벙’ 담가 백자의 얼굴을 얻게 했고 인화 기법은 도장을 꾹꾹 눌러 무늬를 반복했다.
철화는 붉은 흙물을 붓에 적셔 자유롭게 그린 무늬가 검은 선으로 변해 남았는데 당시 분청사기는 화공이 아닌 도공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 무늬를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귀한 도자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한 도자기’로 불린다.
![]() 과거 분청사기 발굴 현장을 재현한 모습. /최현배 기자 |
운대리에 수십 기의 가마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고흥의 흙 덕분이었다. 현대 연구에서도 확인되듯 이 지역의 태토는 곱고 분장이 잘 먹어 다양한 기법 실험에 적합했다. 여기에 맑은 물과 풍부한 땔감, 바닷길을 통한 유통 조건까지 더해져 고흥은 분청사기 생산지로서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분청의 독창적인 미감은 결국 이 땅의 흙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어렸을 적 멀쩡한 그릇을 서로 부딪혀 깨뜨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역 어르신의 회고는 파편을 단순한 유물이 아닌 일상의 풍경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박물관의 본관은 지상 3층 규모로 역사문화실, 분청사기실, 설화문학실 등 다섯 개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역사문화실에는 고흥의 선사부터 근현대까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고인돌 밀집 지역으로 유명한 고흥은 세계 최초로 비파형 동검이 운대리에서 발견되며 고고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불교 문화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군의 활약, 나로우주센터 개관까지 고흥의 시간은 도자기와 함께 이곳에 겹겹이 전시돼 있다.
![]() 분청사기 전시실과 분청문화공원, 한옥 공방, 야영장까지 어우러진 복합공간인 고흥분청문화박물관 내부. /최현배 기자 |
전시실에는 관람객이 직접 파편을 만져볼 수 있는 체험코너도 마련돼 있어, 분청을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손끝의 기억으로 남게 한다.
설화문학실에서는 고흥 지역의 대표 설화 30여 편이 인터렉티브 미디어로 구현돼 관람객의 눈길을 붙든다. 단순히 전시 패널을 읽는 것을 넘어 설화 속 장면을 직접 체험하는 오감 콘텐츠는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다. 분청문화공원으로 나가면 분청사기와 설화를 형상화한 조형물, 작은 동물원과 놀이터, 피크닉 공간이 이어져 있어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하루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 ‘고흥 고분, 고대의 문을 열다’. /최현배 기자 |
매년 열리는 전국 분청사기 공모전은 올해로 8회를 맞았으며, 전통 기법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작가는 3D 프린터를 활용해 분청 토템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는 유화처럼 보이는 두꺼운 분장을 도자기 위에 올려 독창적인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글=이보람·주각중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