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권하는 사회 -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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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울합니다’, ‘불안합니다’, ‘ADHD 같습니다’,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번아웃이 왔습니다’, ‘상담 치료를 권해 주세요’ 같은 말들을 거의 매일 듣는다. 학교와, 직장과, 여러 기관에 심리상담 센터가 설치되고 각종의 검사를 통해 정상성 여부(말하자면 맡은 바 역할에 합당한 주체인가 아닌가)를 가리느라 분주하다. 정신과 병원도 갈수록 성업 중인 걸 보면, 바야흐로 정신병의 시대다.
구글 AI에 “최근 한국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 통계”라고 입력해 보았다. 결과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처방받은 환자의 수가 지난 5년 사이 14.5% 증가했다. 둘째, 10년간 개인당 처방량은 그보다 더 증가했는데 20대 160.3%, 10대 이하 111.4%, 30대 70.9% 증가했다. 셋째, 처방 약의 종류는 항불안제, 진정제, 식욕억제제 순이다. 지리적 증가율이 가장 높은 곳은 서울의 강남이었다.
의아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치 간의 모순이다. 두 수치 사이에는 어딘가 생각해 볼만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처방량이 늘었는데 환자의 수도 늘었다. 처방량이 늘었다면 환자의 수가 줄었어야 마땅할 텐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일까? AI가 제공한 정보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일단 제쳐 두기로 한다. 긴 논문이 아니고서야 그 부정확성을 조목조목 증명하기는 힘들 테니, 그 주제는 여기서 살필 겨를이 없다. 다만 수치가 모두 증가 추세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만 받아들여 보자.
처방량과 환자의 수가 동시에 늘었다. 이 모순에 대해 한 가지 상식적이고 쉽게 가능한 해답은 처방된 의약품의 효능이 환자의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약계의 비난을 무릅쓰고 말하건대, 이런 의심은 지극히 합당해 보인다. 영국의 의료인류학자 제임스 데이비스의 ‘정신병을 팝니다’란 책을 읽어 보면(한국에는 작년에 번역되었다) 다국적 제약회사나 그 인근 연구 집단의 잦은 주장과 달리, 향정신성 의약품이 장기적으로는 환자의 치유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갈수록 차고 넘친다.
약의 효능과 무관하게 거대 제약 자본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대답이 너무 단순하다면, 다른 대답도 덧붙일 수 있다. 이른바 ‘의료화’가 그것이다. 의료화란 ‘비의학적 문제가 질병이나 질환과 같은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고 치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의료화 과정을 통해, 얼마 전까지는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던 일련의 증상들을 질병에 포함시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던 질병을 질병으로 명명함으로써 ‘정신질환자’의 범위가 넓어졌고,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통계상 환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가설 말이다. 제임스 데이비스가 ‘슬픔의 책’이라고도 부르는 일명 DSN(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미국정신의학협회 발간)의 행보가 그 증거다.
세계적으로 매년 수천만 권이 팔려 나가고(표준적인 처방을 위해서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는 정신질환 분류표를 제공한다는 이 책에 따를 때 정신질환의 숫자는 1970년대 초반 106종에서 최근 370 종으로 늘었다. 그만큼 다종의 정신질환자들이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저 목록이 기존에는 정신질환이라 부르지 않던 이러저러한 비의학적 증상들을 의학적 대상으로 포섭(이를테면 시장 개척)해 가고 있는 것일까? 저 책의 편찬에 개입하는 제약회사들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시 의료화 과정에는 필연코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다는 결론만 내린다면 여전히 너무 표피적이다. 의료화 과정은 깊은 차원에서 ‘정상성’의 범위를 좁힌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치료가 필요한 비정상적 상태의 분포가 넓어질수록 ‘정상성’의 분포는 좁아진다. 정상성은 이제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품성이 된다. 정상성이 규범화된다. 물론 적응력, 생존력, 경쟁력, 자기 관리, 미래 설계를 위한 투자 같은 (신자유주의적) 미덕이 정상성 규범의 기준일 것이다. 그러니까 의료화는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인 데에서 찾지 않고 개인의 품행과 자기관리 능력으로 전가한다. 다 멘탈이 약한 내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료화 과정은 ‘고통의 시장화’라는 훨씬 교묘하고 장기적인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상품 카탈로그처럼 고통의 분류 항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의학-경제적 처방의 대상이 된다. 고통은 잘 분류된 진열대의 상품과 같아서 정신병의 영역은 거대한 시장을 방불케한다. 와중에 왜 정신질환 판정을 받은 이들이 세대적으로 20~30대에서 크게 증가하는지, 지리적으로 강남에서 성행하는지 등에 대한 사회적 고려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덩달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 보려는 우리들의 노력도 급감한다. 말하자면 정작 중요한 ‘고통의 사회적 병인과 처방’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한다.
그러나 젠장, 지금은 나 역시 마감의 불안에 쫓겨 항불안제 한 알을 삼키고 이 글을 쓴다.
의아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치 간의 모순이다. 두 수치 사이에는 어딘가 생각해 볼만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처방량이 늘었는데 환자의 수도 늘었다. 처방량이 늘었다면 환자의 수가 줄었어야 마땅할 텐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일까? AI가 제공한 정보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일단 제쳐 두기로 한다. 긴 논문이 아니고서야 그 부정확성을 조목조목 증명하기는 힘들 테니, 그 주제는 여기서 살필 겨를이 없다. 다만 수치가 모두 증가 추세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만 받아들여 보자.
약의 효능과 무관하게 거대 제약 자본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대답이 너무 단순하다면, 다른 대답도 덧붙일 수 있다. 이른바 ‘의료화’가 그것이다. 의료화란 ‘비의학적 문제가 질병이나 질환과 같은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고 치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의료화 과정을 통해, 얼마 전까지는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던 일련의 증상들을 질병에 포함시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던 질병을 질병으로 명명함으로써 ‘정신질환자’의 범위가 넓어졌고,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통계상 환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가설 말이다. 제임스 데이비스가 ‘슬픔의 책’이라고도 부르는 일명 DSN(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미국정신의학협회 발간)의 행보가 그 증거다.
세계적으로 매년 수천만 권이 팔려 나가고(표준적인 처방을 위해서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는 정신질환 분류표를 제공한다는 이 책에 따를 때 정신질환의 숫자는 1970년대 초반 106종에서 최근 370 종으로 늘었다. 그만큼 다종의 정신질환자들이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저 목록이 기존에는 정신질환이라 부르지 않던 이러저러한 비의학적 증상들을 의학적 대상으로 포섭(이를테면 시장 개척)해 가고 있는 것일까? 저 책의 편찬에 개입하는 제약회사들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시 의료화 과정에는 필연코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다는 결론만 내린다면 여전히 너무 표피적이다. 의료화 과정은 깊은 차원에서 ‘정상성’의 범위를 좁힌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치료가 필요한 비정상적 상태의 분포가 넓어질수록 ‘정상성’의 분포는 좁아진다. 정상성은 이제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품성이 된다. 정상성이 규범화된다. 물론 적응력, 생존력, 경쟁력, 자기 관리, 미래 설계를 위한 투자 같은 (신자유주의적) 미덕이 정상성 규범의 기준일 것이다. 그러니까 의료화는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인 데에서 찾지 않고 개인의 품행과 자기관리 능력으로 전가한다. 다 멘탈이 약한 내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료화 과정은 ‘고통의 시장화’라는 훨씬 교묘하고 장기적인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상품 카탈로그처럼 고통의 분류 항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의학-경제적 처방의 대상이 된다. 고통은 잘 분류된 진열대의 상품과 같아서 정신병의 영역은 거대한 시장을 방불케한다. 와중에 왜 정신질환 판정을 받은 이들이 세대적으로 20~30대에서 크게 증가하는지, 지리적으로 강남에서 성행하는지 등에 대한 사회적 고려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덩달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 보려는 우리들의 노력도 급감한다. 말하자면 정작 중요한 ‘고통의 사회적 병인과 처방’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한다.
그러나 젠장, 지금은 나 역시 마감의 불안에 쫓겨 항불안제 한 알을 삼키고 이 글을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