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언어, 윌리엄 배스 외 지음, 김성훈 옮김
2025년 10월 23일(목) 19:50
2009년 제주에서 한 보육교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곧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릴 핵심 단서였다. 배수로 속 차가운 시신의 부패 상태만으로는 사망 시점을 정확히 단정할 수 없었고, 수사팀은 국내 최초로 동물 사체를 같은 배수로에 넣어 부패 과정을 실험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실험 결과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만약 당시 환경을 재현한 체계적인 연구로 사망 후 경과시간을 과학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면 진실도 조금 더 선명히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법의인류학자 윌리엄 배스는 이런 의문을 평생의 연구로 삼았다. ‘부패의 언어’는 저자가 미국 테네시주의 ‘시체농장’에서 50여 년간 인간의 사후 변화를 기록해온 여정을 담은 책이다.

시체농장의 시작은 실패에서 비롯됐다. 도굴된 무덤의 시신을 감식하며 사망 시점을 ‘몇 달 전’이라 단정했던 윌리엄은 그것이 남북전쟁 시기의 방부 처리된 시신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부패의 속도를 결정짓는 요인이 온도와 습도, 재질과 환경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그는 실험을 통해 사후 변화를 체계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불에 탄 집의 잔해에서 남은 금속 단추, 뼈에 새겨진 톱날 자국, 구더기가 남긴 번데기 껍질 하나까지 부패의 흔적은 죽은 자의 마지막 증언이 됐다.

무겁고 잔혹한 소재이지만 저자의 시선은 냉정하지 않다. 익명의 시신을 ‘연구 대상’이 아닌 ‘증언자’로 바라보며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묻는다. 책을 덮고 나면 공포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서려는 한 과학자의 조용한 태도가 마음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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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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