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예술가들의 일상과 창작 빚어지는 구례예술인마을
2025년 09월 17일(수) 17:50
하늘에서 내려다본 구례예술인마을 전경. /최현배 기자
“파주에 출판도시가 있다면 지리산 자락에는 구례예술인마을이 있다.”

지리산 자락 구례군 광의면의 한 마을은 멀리서 보면 전원주택 단지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조금은 다른 기운이 감돈다. 정원에는 꽃과 나무가 가꿔져 있고 마당에는 예술가들의 작업 흔적이 묻어난다. 누군가의 화실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다른 집에서는 흙냄새 가득한 도예 작품이 빚어진다. 또 한쪽에서는 현악기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구례예술인마을’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삶터이자 작업실이다. 마을은 2008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화가들의 동호회에서 땅을 사기 시작하며 싹을 틔웠다. 이후 2013년 공식 개촌을 하며 ‘구례예술인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주축이었으나 지금은 서양화, 도예, 음악, 무용,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 현재 31가구가 입주해 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인 18가구가 실제로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입주 예술인 중 일부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활동하다 귀촌했거나 또 일부는 구례의 자연과 인연을 맺으며 정착했다.

서양화가 손한희 작가가 운영하는 한갤러리에서 수강생들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 /최현배 기자
마을 첫 방문지는 전임 촌장인 손한희 작가가 운영하는 ‘한갤러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클래스를 진행중인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주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인천에서 살던 그는 구례 환경에 반해 이주했고, 마을 시작부터 함께한 개척자다.

“31가구가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또 그중 다섯 가구가 중심이 되어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각자의 집이 오픈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자 체험 공간입니다. 방문객이 찾아오면 그림이나 도예, 아크릴화, 스텐실 등을 체험할 수 있어요.”

손 작가는 교육실과 미니 아트숍, 카페를 함께 운영하며 회원들의 작품전도 열어왔다. 구례의 풍경은 그의 그림 속에 담겨 지리산과 섬진강을 주제로 한 작품도 탄생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을 예술인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현 촌장 이희경씨, 꽃을 예술로 가꾸는 ‘허브의 작업실’ 최임숙씨, 첼로를 배우고 있는 주민 장미씨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마을 이야기를 풀어냈다.

도예공방 ‘화수분’ 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술인마을 주민들. /최현배 기자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도예공방 ‘화수분’이에요. 예약하면 흙을 빚고, 완성된 작품을 전시와 판매로 이어갈 수도 있어요.” 최범창 작가가 운영하는 화수분은 체험과 전시, 판매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오픈 스튜디오다. 이날은 작가가 자리를 비웠지만, 대신 다른 예술인들이 모여 마을의 여름나기와 최근 폭우로 인한 피해, 곧 오픈을 앞둔 복합문화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나눴다.

‘허브의 작업실’을 가꾸는 최임숙씨는 귀촌 4년 차다. “내집 앞 정원도 좋지만 마을 전체가 예쁘니 아침 산책도 행복하다”며 웃었다. 특별한 전시나 공연을 하지 않아도 꽃이 피는 정원 자체가 그의 작품이자 생활이었다.

이희경 촌장은 올해로 3년째 ‘자서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받아 책으로 만들어드리고 영상도 기록으로 남긴다. 서울에서 활동하다 이곳과 인연을 맺은 그는 예술인마을이 단순히 예술가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마을로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어 장미 씨를 따라 도착한 곳은 ‘GA 앙상블’ 연습실. 집 아래 작업실을 무료로 내어주어 주민들과 함께 현악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공간이다.

구례예술인마을 주민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정미경씨가 결성한 ‘GA 앙상블’ 발표회. <정미경씨 제공>
같은 마을 주민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정미경씨가 이끌고 있는 앙상블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과 구례를 오가며 현역으로 연주 활동을 하는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가르치며 새로운 음악공동체를 만들었다.

“현 인원은 13명이고, 이 중 네 분은 예술인마을 주민이에요. 나머지는 구례와 순천에서 오십니다. 이름은 ‘GA 앙상블’. G는 구례(Gurye), A는 아미치(Amici) 또는 아르코(Arco) 첫 글자를 땄어요. 이탈리아어로 아미치는 친구, 아르코는 현악기의 활을 뜻해요.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작은 산골 마을에 현악 앙상블이 결성돼 정기 연주회를 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예술인마을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미래 공간도 있다. 최근 전시와 공연을 함께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건립됐으며 정식 개관을 준비 중이다. 구례군이 건립한 이 공간은 1층은 공연장, 2층은 전시관으로 꾸며져 향후 마을 작가 뿐 아니라 외부 작가들의 작품도 초청해 전시될 것으로 기대된다. “공간이 활성화되면 마을 전체가 활력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촌장의 바람이다.

예술인마을은 단순히 예술가들의 집합지가 아니다. 주민들은 빗물이 고인 길을 정리하고, 나무가 쓰러지면 함께 치우며, 생활의 불편함도 서로 도우며 해결한다. 마을이장과 함께 회의를 하고 당동마을이라는 원래 지명 속에서 전통과 현대를 잇는다. 마을 분위기는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면서도 필요할 때 힘을 모으는 공동체였다.

정원예술가 김애자씨가 10여 년 가꾼 ‘솔향’ 정원. /최현배 기자
마을을 둘러보다 아름다운 정원에 이끌려 발길이 멈춘 곳. 정원예술가 김애자씨의 정원 ‘솔향’이다. 10년 전 나무 한 그루 없던 곳이 지금은 명품 소나무 정원으로 바뀌었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 자연을 찾아 내려왔는데, 지금은 다른 어떤 곳보다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예술인들의 손끝이 닿으며 마을은 정원마을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워졌다.

구례예술인마을은 작은 축제도 연다. 해마다 열리는 ‘예술인마을 축제’는 오픈스튜디오와 공연, 전시가 어우러지는 시간으로 방문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예술인들과 교류하는 장이 된다. 아직 공식 홈페이지도 없고 체계적인 홍보도 부족하지만 입소문을 통해 체험 문의와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방문객에게는 색다른 문화경험을 선사하고 지역에는 예술적 활력을 불어넣는 구례예술인마을. 앞으로 남은 과제는 주변 마을과의 융합이다. 예술인 개인이 마을에 정착할 때보다 공동체 단위로 움직일 때 지역과의 접점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보람·이진택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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